최근 큐레이터와 평론가 등 미술계 관계자들이 올해의 기대주로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42)씨를 꼽았다. 2007년 30대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됐던 그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백남준에 이어 두 번째로 영상 작업을 영구 소장한 한국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대와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조소를 전공했지만 그의 작업은 사진, 설치, 영상을 넘나든다.
6일 서울 사당동에 자리한 정씨의 작업실을 찾았다. '앨비스 궁중반점'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작업실은 그의 작업처럼 경계 위에 놓여져 있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부터 앨비스 프레슬리의 팬이었던 그가 1999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처음 연 전시가 '앨비스 궁중반점'. 이 간판은 그때 사용한 소품이다. 작업실은 그의 작품에 등장했던 소품들로 가득 차 있다. 세트를 뚝딱뚝딱 만들어냈을 공구들이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고, 그 위에는 작업실 전체를 압도하는 뿔 달린 사슴 박제가 걸려 있다. 사슴과 정연두 사이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아버지'예요.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제 작업은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아버지께선 약대 시절 산에 약초를 캐러 다니고 졸업 즈음엔 약초보감을 직접 만드셨어요. 무엇보다 양약이든 한약이든 환자를 낫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죠. 그 영향을 받아 저도 어떤 매체를 다루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담아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죠."
이처럼 매체를 넘어 일정한 주제를 추구하는 정씨의 작품세계는 꿈과 현실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개성이 드러난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고등학생을 담은 사진 옆엔 개 썰매를 타고 설원을 달리거나 카 레이서가 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나란히 걸린다. '내사랑 지니'(2003) 시리즈다. 또 병환 중인 남자친구가 회복되면 제주도에 낙타를 타러 가자고 약속했다는 할머니가 이야기 하는 화면 옆에는 그 약속을 세트장에 고스란히 재현하는 영상이 함께 재생된다. 공원에서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인생 최고의 기억을 영상으로 재현한 '수공기억'(2008) 시리즈 중 하나다. 이밖에도 '원더랜드'(2004) '로케이션'(2005)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2007) '씨네 매지션'(2009) '애덜레선스(adolescence)' (2011) 등의 시리즈가 대부분 현재 진행형이다.
일련의 판타지 시리즈 덕분에 일명 '꿈을 실현시켜주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내사랑 지니'를 대안공간 루프에서 처음 전시했을 당시 방명록에 적혔던 두 개의 글처럼 현실과 판타지 혹은 꿈의 경계에서 중립적으로 서 있다고 말한다. "두 명의 관람객이 방명록 한 페이지에 글을 남겼는데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이었죠. 어떤 분이 '사람들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아름다운 작품에 감사'라고 썼는데, 그 아래에는 '현실에선 불가능한 꿈을 사진으로만 실현시킬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을 냉소한 작품'이라고 적혀 있었죠. 극단적인 두 반응이 만족스러웠어요. 예술가로서 제가 가진 중립적이면서도 관찰자적인 입장이 성공적으로 보여졌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판타지나 현실로 아우를 수 없는 그의 작업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다. 그의 작품엔 늘 사람이 등장하고, 그들의 기억과 꿈을 말하고, 때론 남녀가 짝을 지어 황홀한 춤을 추기도 한다. "예술은 문화의 일부고 문화는 사람이 만든 문명의 일부잖아요. 사람이 사람 사는 문제에 지루함을 느낀다면 인생 자체에 이미 지루함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서 예술이라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를 다루는 매체인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도 합니다."
2월 일본과 중국, 미국에서 열리는 세 전시로 올해 해외 활동의 스타트를 끊는 그는 돌아오는 대로 '씨네 매지션' 시리즈의 새 작품을 제작할 예정이다. 요즘은 두 대의 커다란 모니터 앞에서 지난 10여년의 작품활동을 정리하는 아카이브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거의 매년 새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지속해가는 작업이 힘들 법도 한데, 그는 이 기나긴 여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예술가가 어떤 작품으로 성공하면 작품 세계를 변화시키기가 상당히 어려워요. 한 작업이 그 작가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게 되면 그것에 지배를 받게 되거든요. 어떤 작업을 하든 저다운 것을 찾고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제 자신을 시험대에 올리는 거죠."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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