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마약이다. 계속 살면 피폐해진다. 사랑은 이별한다고 잊거나 잊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덮어두고 떠나는 것이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중인 시인 이이체(24)씨. 약관의 나이에 한국시단에 이름을 올린 그가 최근 펴낸 첫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 (문학과지성사 발행)에 적은 '시인의 말'이다. 어떤 희망의 빛도 꺼져 버린 듯한 시집엔 허무와 권태, 죽음과 이별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스스로를 고독과 독신의 탑에 유폐시켜 버린 '어린 은자'의 모습은 중세 수도승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이 시대의 한 징후라 본다면, 지금 20대의 과민성 염세(厭世) 증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죽은>
근래 한국 시단의 중심부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고 있는 이들이 다름아닌 80년대생 시인들이다. 지난해 80년생 동갑내기 유희경씨의 <오늘 아침 단어> , 최정진씨의 <동경> 과 조인호(31)씨의 <방독면> 등이 잇따라 나왔고, 지난해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서효인(31)씨의 두번째 시집 <백년동안의 세계 대전> 도 최근 출간됐다. 올해도 이우성(32) 김승일(25) 박성준(26)씨의 첫 시집이 나올 예정이다. 지난해 이혜미(25)씨의 <보라의 바깥> 에 이어 이이체씨의 첫 시집이 나온 것을 감안하면 80년대 중후반생, 그러니까 20대 중반 시인들까지 대거 자신의 시집을 상재하며 한국 시의 흐름을 잇게 되는 셈이다. 보라의> 백년동안의> 방독면> 동경> 오늘>
지난 10여년간 70년대생이 중심인 '미래파'가 새로운 언어적 혁신으로 많은 논란도 야기하며 시단을 들끓게 했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그 동력을 잃으며 침체된 상태였다. 80년대생 시인의 등장이 그런 의미에서 한국 시단에 시적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되는 분위기다. 평론가 허윤진씨는 "80년대생 시인들은 제 각각의 스타일을 갖고 있어 하나의 경향으로 호명하기가 힘들다"며 "지난해 이어 올해 80년대생 시인들의 시집들이 본격적으로 나오는 만큼 올해 시단의 화두는 이 세대의 시작(詩作)을 규명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 각각 다양한 개성과 시풍을 갖춰 하나의 경향으로 불리기 어렵지만, 그런 만큼 개별적인 자의식이 강하다는 점이 80년대생 시인의 특징이다. 특히 이들은 시가 사실상 소수의 독자만 즐기는 인디 문화가 된 이후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시에 대한 태도는 더욱 진지하다. 평론가 강계숙씨는 "시가 정말 좋아서, 시가 아니면 할 게 없다는 식으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더 간절하게 시를 추구하면서 사회적 요구나 남의 시선에 눈치 보지 않고 나아가는 자유로움이 있다"고 말했다. 20대 당사자인 이이체씨도 "우리 세대 시인들이 과도하게 진지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는데, 시인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고 시를 더욱 일상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 는 이런 80년대생의 시 경향을 보여주는 리트머스지다. '믿음을 잃은 사제의 수도원'이라고 할 만큼 음울하고 비관적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실존을 탐색하는 문제의식이 가볍지 않다. '나는 상처 받은 역할에 충실했으므로 책들을 옷 삼아 은닉되었다'('골방연극' 중) '시궁창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다리를 감싸고 있다'('추락한 부엌' 중) 등 지독한 절망과 허무감이 특히 두드러진다. 죽은>
이씨는 "우리 세대가 풍요의 시대에서 자랐다지만, 그 풍요 속에서 결핍이나 상실감은 더 큰 것 같다"면서 "슬프지만 오열할 상대를 정확히 몰라, 유폐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설픈 희망의 약속이 가짜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세대지만, 그렇다고 삶의 긍정성을 모두 잃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 시 쓰는 것 자체가 일종의 구원인 셈. 이씨는 "이탈리아어로 간직하다는 말에는 애무하다는 뜻도 있다고 하는데, 내적으로는 시를 통해 끊임없이 간직하고 어루만지려는 자의식이 있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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