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공무원 아흐마트 드로지오는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과 함께 청와대 방문을 위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숙소를 나선 뒤 '뭘 빠뜨리고 왔다'는 느낌에 다시 방으로 향했다. 호텔 숙소 문을 열었을 때 낯선 사람들이 있었다. 순간 '호실을 착각했나' 생각했지만 침대 위의 익숙한 옷가지와 캐리어를 보고는 자신의 방임을 깨달았다. 20~30대로 보이는 남자 둘과 여자 하나. 옷차림이나 남녀의 구성상 일반적인 절도범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낯선 이들의 등장에 깜짝 놀란 아흐마트는 곧 얼어붙었고 그 사이 침입자들은 복도를 지나 사라졌다. 그 짧은 6분 사이 노트북이 없어졌다. 아흐메드는 복도에 있던 호텔 종업원에게 낯선 이의 침입과 노트북 분실 사실을 알리며 항의했고, 웬일인지 노트북은 곧바로 주인에게 되돌려졌다.
지난해 2월16일 발생한 황당하고도 이상한 이 절도사건은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이란 이름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고등훈련기 T-50 수출 성사를 위해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협상 전략을 엿보려는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특사단 숙소에 들어갔다 들킨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경찰 수사는 곧 사건 발생 1년을 맞게 되지만 한 발짝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 관계자는 6일 "아직도 수사 중인 상황"이라며 "이 외에는 어떤 것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이 호텔 직원 등 관련자 소환 조사나 CCTV 분석 등 별다른 추가 수사를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 중'이라고 밝힌 것은 사실상 '영구미제'를 예고한 것과 다름없다는 게 세간의 평이다.
실제로 범인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몇 안 되는 증거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된 상태. 당시 경찰청 지문감식센터는 아흐마트의 노트북에서 채취한 지문 8점 가운데 특사단원의 것과 감정 불능 각 2점을 제외한 4점을 분석했지만 "지문으론 신원이 검색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CCTV 화면에 나타난 괴한들의 모습도 화면이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신원 확인에 실패했다. 또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이후 새로 나온 증거물도 없다.
하지만 당시 경찰 수사 관계자는 "우리가 CCTV 내용을 공개하면 국정원도 롯데호텔도 다 죽는다"고 말해 경찰이 단서를 잡고서도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의혹을 샀다. 이 관계자는 또 "(용의자 신원을) 공개하면 우리도 죽는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상급 기관인 서울경찰청이 "국정원이 관련됐다는 어떤 근거 자료도 없다. 담당자가 무의식 중에 한 발언"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손으로 하늘 가리기였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불미스러운 사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5월 T-50 16대(4억달러)의 인도네시아 수출이 성사된 것은 다행"이라며 "양국 고위 채널에서 어느 정도 양해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나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다 지난 이야기인데"라며 사건 언급을 회피하고 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뜻하지 않은 실수'라고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소위 국익이라는 이름 하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의 경찰은 캐비닛 깊숙이 이 사건을 묻어두겠지만 우리 정보기관의 치욕적인 오명사건으로 남은 세인들의 기억을 지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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