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 '300만원 돈봉투'가 돌려졌다는 말이 나오면서 드디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말이 이어지고 있다. 고승덕 의원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며 그 이유와 저의를 해석하느라 분주하다. 네티즌들이 난리를 치고, 트위터러들은 대목을 만났다. 그들이 퍼서 나르는 내용들은 '고승덕의 폭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어 왜 지금 시점에, 무슨 의도를 갖고 폭로를 했느냐에 초점이 모이고 있어 자칫 본질이 훼손될 여지가 다분해 보인다. 당내 정풍운동을 위한 의거다, 한쪽 편을 돕기 위한 음모다 등의 논쟁이 그런 것들이다.
■ 그의 돈봉투 얘기가 새삼스럽게 폭로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경위를 살필 필요가 있다. 돈봉투 얘기를 공개하고 3주일이 지나서야 '메가톤급 폭로'로 변형됐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달 14일자 서울경제신문 칼럼에서 '후보로부터 돈봉투를 받았다가 돌려주었다'고 썼다. 다음날 한나라당은 당헌ㆍ당규를 개정하여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새로 하느냐 마느냐 논쟁이 한창이었고 고 의원은 '전당대회 유감'이라는 칼럼에서 전당대회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 가운데 돈봉투 살포를 거론했다.
■ 한참 지난 뒤 그가 한 언론과 인터뷰 도중 지나간 칼럼의 내용을 질문 받았고, 맞다고 대답했던 말이 '돈봉투를 받아 챙겼다'고 시인한 것으로 오해되는 일이 생겼다. 이튿날 지역 유권자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그들에게 '돌려주었다'고 해명하는 과정이 발언의 전부였다. 지난 달의 칼럼을 누구도 폭로로 여기지 않았던 것처럼 3주일이 지난 뒤의 대답과 해명도 양심선언이나 내부고발로 볼 수는 없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던 말들이 마른 섶에 불길을 던진 듯 폭발한 이유는 최근에까지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더욱 깊고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결국 판도라의 상자는 누가 연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의지에 의해 자연스럽게 열린 셈이다. 그 동안 쌓여왔던 압력을 견디다 못해 마지막 깃털 하나의 무게로 낙타의 등이 부숴지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폭로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한데 그 의도나 저의를 가늠하려 드는 것은 작은 일이다. 친이나 친박의 이해를 따지는 것도, 여야의 유ㆍ불리를 계산하는 것도 하찮을 따름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 온갖 재앙과 질병처럼 정치권의 고질병과 부패상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다. 국민이 열어 젖힌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남은 희망이란 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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