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나려면 집안에서 꿈쩍 않고 최소한 한달 이상 버틸만한 식량을 미리 준비해야 되지 안컷소(않겠어요)."
지난 4일 찾은 대기리는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지난해 말과 올 초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마을은 소설 속의 설국(雪國)이 돼 있었다. 경사진 산길에는 어른무릎 높이의 눈이 쌓인 곳도 보였다. 마을은 인적이 끊겨 고요했고, 지붕에 길게 얼어 붙은 고드름은 이곳이 얼마나 추운 곳인지를 짐작케 했다.
마을 초입에서 산길을 따라 2㎞가량을 걸으니 산비탈 고랭지 채소 밭이 눈에 푹 잠겨 한 폭의 그림 같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지명인 '안반'과 고원을 뜻하는 이곳 사투리 '데기'를 합쳐 '안반데기'라 불리는 곳이다.
대관령 아래 첫 마을인 강원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해발 700m고지로 동쪽으로는 강릉, 서쪽으로 평창 횡계리, 정선 임계리와 접해 있는 이곳에 고랭지 농업을 하는 240가구가 띄엄띄엄 살고 있다. 강릉에서도 예전부터 대기리에 산다고 하면 산골 중에 산골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오지지만 전국적으로 눈이 가장 많이 내리기로 더 유명한 곳이다. 연 평균 누적 적설량이 초등학교 5학년 키 높이 정도되는 140cm. 전국 평균 45cm보다 3배 이상 많다. 편서풍을 타고 온 구름대가 이 곳에 집중적으로 눈을 뿌리고 대관령을 넘어가기 때문이다.
도로사정과 제설장비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이 곳은 겨울이면 항상 '육지 속의 섬'이 된다. 눈만 내리면 강릉과 평창, 정선에서 대기리로 이어지는 고개인 닭목령과 삽당령이 통제돼 고립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에게 폭설과 고립, 구조는 겨울생활의 일부가 돼 버렸다. 헬기로 생필품이 공수되는 장면도 낯설지 않다. 대관령 아래 첫 마을인 대기리 사람들의 어떻게 공포의 겨울을 나고 있을까.
주민 최대집(60)씨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10월 말이면 쌀, 비숫가루, 옥수수 등 겨울나기 생활필수품 준비를 서두른다"고 했다. 김장도 이 무렵 한다. 땔감은 늦어도 11월 중순까지 앞마당에 쌓아 놓아야 한다. 자칫 폭설로 배달트럭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식처럼 키우는 소의 여물을 넉넉히 준비하는 것도 중요한 월동준비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폭설로 식수난을 겪은 뒤엔 지하수를 끌어올 수 있는 자가펌프도 생필품이 됐다.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고 홀로 살고 있는 김모(79) 할머니는 "길을 나섰다가 얼어 죽을까 두려워 눈이 오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며 "이번 겨울에도 눈으로 2, 3차례 이상 고립될 것으로 예상하고 생필품을 준비해 놨다"고 했다.
'두 집 살림'을 하는 것도 대기리 주민들의 겨울나기 방법이다. 산새가 깊은 고랭지 밭인 '안반데기'일대 26가구는 아예 강릉과 평창으로 내려와 피난살이를 한다. 실제 안반데기에는 대문에 자물통을 채워 놓은 집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주민 유시복(46)씨는 "주민들 모두 농한기에는 하산했다가 고랭지 배추 파종을 위해 3월쯤 다시 대기리로 올라가 생활한다"고 설명했다.
눈은 낭만이 아닌 사투의 대상
이곳 주민들에게 눈은 낭만의 소재가 아닌 생존을 위한 사투의 대상이기에 대부분 생사를 넘나든 경험을 몇 가지씩 갖고 있었다. 대기리에서 나고 자란 김진성(81) 할아버지는 "30년 전에는 버스가 마을에 들어오지 않아 쌀이나 옥수수 등 식량과 기름을 사기 위해 강릉시내나 정선읍내 장터까지 20리를 걸어야 했지. 그런데 눈보라가 몰아쳐 산속에 고립된 적이 몇 차례 있어. 이러니 눈을 좋아할 수가 있나"라고 쓴 웃음을 지었다.
이양운(69)씨도 "예전에 정선 임계장터를 다녀오다 삽당령에서 해가 저물어 나무껍질을 씹으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며 "얼어 죽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 2월 쏟아진 폭설은 눈에 이골이 난 이곳 주민들도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당시 70cm의 눈이 쌓였고, 마을전체가 사흘간 고립됐다. 비상식량과 식수가 떨어진 일부 주민은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오과현(46) 대기리 마을회장은 "하늘이 그렇게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폭설로 대기리에서 강릉시내와 평창 횡계읍, 발왕사 쪽으로 통하는 도로가 모두 두절돼 생필품 보급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치워도 끝이 없는 눈 속에서 군장병과 공무원, 주민들이 사흘 동안 보급로를 뚫기 위해 벌인 사투는 그야말로 처절했습니다."
매년 겨울 상상을 초월한 눈 폭탄이 내리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 별다른 조난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립에 따른 공포가 워낙 큰 만큼 월동 준비를 그만큼 철저히 하고 조심을 하기 때문이다.
"눈을 관광 상품화하자"
대기리 주민들은 근년 들어 역발상을 하기 시작했다. 공포?대상인 눈을 관광상품화 하려는 노력이다. 젊은 40대가 주축이 돼 지난해 12월 23일부터 3일간 연 겨울 축제가 그것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대기리는 사진작가들에게 유명 촬영지였으니 주민들의 이런 움직임이 때늦은 감도 없지 않다. 설경과 산촌체험, 거기에 청정 농산물까지 곁들여진 겨울축제는 도시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오과현 이장은 "1,000여명의 방문객이 축제에 찾아와 마을을 소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며 "고랭지 배추와 씨감자 등의 판로개척에도 도움이 됐고 대기리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이라는 인식을 심었다"고 말했다.
강릉=박은성기자 esp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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