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성이 강한 선물투자에 빠져 금융권 대출한도까지 초과한 대기업 오너가 급전이 필요해 회사돈을 끌어 쓴 사건.
5일 SK그룹 최태원 회장 형제의 횡령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한 검찰은 사건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했다. 검찰은 특히 과거 기업범죄와 달리 서민대출을 위한 저축은행과, 중소기업 투자 목적으로 설립된 창업투자사를 이용해 회사돈을 횡령한 '죄질이 나쁜 신종 금융 범죄'로 규정했다.
최 회장 형제가 회사돈에 손을 댄 계기는 선물투자였다. 검찰에 따르면 1998년 전후에 무속인 김원홍(51ㆍ해외체류)씨를 알게 된 최 회장 형제는 선물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2008년 5월까지 본인 급여, 소유 주식 매도대금, 제1금융권 신용대출 등으로 투자금을 조달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손실과 반복된 투자로 신용대출까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자, 최 회장 형제는 저축은행에 주식을 담보로 내주고 창업투자사인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 김준홍(47ㆍ구속기소)씨 명의로 차명대출까지 받았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형사 처벌 사안이 아니었다.
문제는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부터다. 최 회장 형제는 당시 주가지수 변동폭이 크자 선물투자의 기회로 보고 투자금을 마련하려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동성 위기에 시달린 저축은행은 대출을 기피했다. 최 회장 형제가 그래서 고안한 것이 계열사 자금을 동원해 펀드에 출자하고, 다시 펀드에서 돈을 빼내는 방법이다.
최 회장은 우선 2008년 10월말 계열사 SK텔레콤, SKC&C에 497억원을 마련해 베넥스에 선출자 형식으로 '위장 납입'을 지시했다. 한달여 뒤 두 계열사가 투자한 펀드의 설립 시기가 다가오자 497억원을 변제하기 위해 SK가스, SK E&S, 부산도시가스 등에 다시 베넥스의 또 다른 펀드에 495억원을 출자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선물투자 이익금으로 펀드의 빈 곳간을 채워 넣으려던 최 회장 형제의 계획은 연이은 투자 실패로 무산됐다. 그러자 최 부회장은 베넥스 자금 750억원을 저축은행 3곳에 예금하고 이를 담보로 거의 같은 금액을 대출받아 일부는 베넥스 계좌에 채워 넣고 나머지는 다시 선물투자에 썼다.
또 베넥스로 하여금 최 부회장의 차명 보유 주식을 고가로 매입하게 하는 방식도 동원됐다. 최 부회장은 지난해 5월 차명 보유하던 I사 비상장 주식 6,590주를 적정가(29억원)보다 훨씬 비싼 230억원에 사들이도록 베넥스에 지시했다. 매각대금 중 180억원은 선물투자금으로 사용됐다.
검찰은 이날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SK그룹 전반이 아닌, 문제가 된 그룹 오너만 처벌하는 등'환부만 도려내는 스마트한 수사'를 했다고 자평했다. 실제 검찰은 횡령 과정에 동원된 계열사 대표들은 처벌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다만 지난해 11월 초 SK그룹 압수수색 과정에서 증거인멸을 시도한 그룹 법무실 이모 상무 등 직원 4명은 약식기소됐다. 이들은 압수수색 전 회장실 컴퓨터를 치우고 증거물을 옮기는 장면이 포착된 CCTV를 삭제하는 등 주요 증거를 인멸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압수수색 전날 밤 SK그룹 직원들이 '압수수색에 대비해라'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았고, 관련 내용이 적힌 메모지도 확보했다. 이는 SK그룹이 중요 수사 정보를 사전에 입수, 전사적으로 사건의 실체를 은폐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어떤 방식으로 SK그룹 측이 정보를 입수했는지 경위는 파악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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