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려움·분노에 얽매이지 말라… 삶의 주인공은 멘토 아닌 당신"
2007년 20대에게 갑자기 "토익책을 덮고 짱돌을 던지라"던 책 <88만원 세대>부터 2011년 돌풍을 일으킨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 까지, 최근 20대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면서 누군가는 20대를 질책했고, 누군가는 20대에게 위로를 보냈다. 하지만 20대의 현실은 어떤가. 등록금 취업 결혼 출산, 어느 것 하나 쉬워진 게 없다. 오히려 "갈수록 더 힘들다"는 하소연이 늘고 있다. 아프니까>
20대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부문에서 겪고 있는 좌절과 기대를 점검한 한국일보 신년기획 '대한민국 20대 리포트'는 시리즈 마지막회로 대담을 준비했다. <88만원 세대> 저자이자 타이거픽쳐스 자문으로 일하고 있는 우석훈(44) 박사(경제학),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낮은 목소리' 등을 연출한 변영주(46) 감독에게 20대가 힘을 낼 수 있는 방법과 힘을 내야 하는 이유를 들어봤다. 좌담은 한국일보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취합한 20대의 질문을 본보 20대 기자들이 자신들의 고민과 함께 물어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사랑할 여유 마저 빼앗긴 20대
20대들은 이런 고민을 많이 보내왔다. "결혼과 출산이 사치처럼 느껴져요." "소외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며 따뜻한 삶을 살고 싶지만 당장 내 처지가 힘들어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비정규직 학원 강사인데 앞으로 가정을 꾸리려면 지금이라도 정규직 일자리를 구해야 할까요?" 우 박사와 변 감독이 대학 강단에서 만난 20대들의 상황도 이들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우석훈 박사(이하 우)=요즘 20대는 사춘기나 성장통이 없고 성욕도 없는 '애어른'이다. 대학생들과 스터디를 하면 과거에는 한 스터디 내에서 몇 커플이 나왔지만 요즘은 그런 게 거의 없다. 자기가 평생 아르바이트하며 비정규직으로 살 것 같으니까 사랑하는 감정까지도 스스로 제어를 하고 있다.
변영주 감독(이하 변)=20대는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다. 40, 50대에 실패하는 것보다는 20대에 실패해 보는 게 낫지 않나. 물론 나도 영화 촬영을 며칠 앞두면 촬영과 관련된 실용적인 고민만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 때 내가 정작 해야 할 질문은 '나는 이 영화를 왜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실용적인 고민만 많이 하면 근원적인 질문을 잊기 쉽다.
기자=20대만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변=대학에서 강의하면 첫 시간엔 항상 학생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한다. 지금 20대가 힘든 건 대부분 기성세대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렇게 못했다. 오히려 대학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부터라도 기성세대가 나서야 한다. 후배를 위해서 대학 동창회 차원에서라도 반값등록금 농성을 해야 하고, 사랑할 공간조차 없는 20대를 위해 정책적인 차원에서 무료로 숙소를 제공해줘야 한다.
적들의 음모, '멘토'
너도나도 멘토를 찾는 시대에 이들은 오히려 "멘토를 죽여라"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멘토라고 부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우=임제 스님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고 말했다. 멘토라는 말 자체가 적들의 음모다. 유럽식으로 멘토, 즉 마에스트로는 정말 어렸을 때부터 무릎에 앉혀 키우며 삶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미국식 멘토는 일방적으로 자신을 따르라는 것에 가깝다. 제일 못 믿을 사람이 스스로를 '멘토'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기자=그래도 20대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에 열광하며 멘토를 찾고 있다. 아프니까>
우=마음이 허하고 불안하니까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았나 싶어서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결국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로 성공했을지 몰라도 책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변=<아프니까 청춘이다> 에서 말하는 내용은 상처 입은 20대에게 기성세대가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내가 더 아팠어, 그래도 다 나았으니 너도 참아'라는 식의 정말 치사한 조언이다. 20대가 아프면 약을 발라줘야 하는 것 아닌가. 또 20대가 자기계발서에서 답을 구하려는 건 드라마로 치면 1회만 보고 바로 마지막회를 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살아야 할 세상에 대해서는 스스로 고민해라. 어른들 말 들으려 하지 말고 또래 친구들과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야 한다. 아프니까>
'20대의 시간이 왔다'
우석훈 박사와 좌담을 한다는 소식에 20대는 이 질문을 가장 많이 던졌다. "짱돌을 던지라는 식의 추상적 구호 말고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런데 우 박사는 오히려 답답해 했다. 지금 20대가 주인공인 시대, 20대의 시간이 왔으니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자기 혼자만 한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방법이 없다', '불가능하다'라고 한다. 총선과 대선에서 요구하면 가능하다. 양대 선거가 있는 올해는 20대가 주인공이다. 80년대에는 20대라고 하면 대학생만을 한정하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더욱 다양한 계층의 20대를 아우르는, 전에 없이 큰 힘이다.
변=20대 양극화가 굉장히 심해지면서 지금이야말로 판을 깨고 '짱돌'을 들기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절벽에 선 20대가 이렇게도 많은데 잘 안 되는 이유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우=20대는 집단적으로 성공해 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20대의 가장 큰 적이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경험을 모아 나가야 한다. 지난해 초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에게 20대가 힘을 보태 변화를 이끌었다. 지난 여름에는 반값 등록금 시위를 벌였다. 나는 20대가 집회에 나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었는데 10년 만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올해는 특히 정말 무서운 힘이 될 거다.
변=하지만 20대가 분노의 힘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지지하는 것을 위해 움직일 때에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맞다. 분노가 힘은 세지만 그 위에 새로운 사회를 쌓을 수는 없다. 사실 아직까지 20대가 원하는 사회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계속 논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분명한 건, 20대의 에너지가 굉장히 깊고 크다는 것이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 좌담 참석자
▲ 우석훈 박사
서울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현대환경연구원, 기후변화협약 정부대표단 등에서 활동했고 녹색당 창당을 준비하기도 했다. 현재 성공회대에서 외래교수로 강의하고 있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2.1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최근 영화제작사 타이거픽쳐스 자문을 맡았고 인터넷 라디오방송 '나는 꼽사리다'에도 출연 중이다. 생태경제학이 주 전공이지만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의 문제를 두루 다룬다. 저서는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2006) <88만원세대>(2007) <문화로 먹고살기> (2011)등. 문화로> 한미>
우 박사는 20대 때 "굶어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가 컸다고 한다. 1990년대 초 프랑스에서 좌파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동구권이 붕괴했기 때문. 자신의 전공이 빛을 보지 못하리란 생각에 보석 세공, 빵 굽기 등을 부업으로 준비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그 때 참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했구나 싶어요. 20대 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세끼 밥 먹는 건 문제 없어요."
▲ 변영주 감독
이화여대 법대를 나와 중앙대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전공했다. 스물 일곱 살에 국제 매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으로 데뷔했다. 이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사연을 담은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1, 2, 3편을 각각 1995년, 1997년, 2008년 제작했다. 최근에는 3월 개봉하는 미스터리 스릴러 '화차'의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다. 주요 작품은 '밀애'(2002) '발레교습소'(2004) '20세기를 기억하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방법'(2008) 등.
변 감독이 20대 때 한 가장 큰 고민은 "이렇게 살다 보면 정말 끝장이겠지?"였다고 한다.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다 '무서워서' 그만뒀고, 게임 '버블버블'의 대마왕이 나오는 100판을 돌파할 정도로 하루 종일 오락실에 앉아 있기도 했다. 방황하며 영화만 보던 그에게 부모가 진지하게 비디오 대여점을 차려줄까 묻기도 했다고 한다. 졸업 마지막 학기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목록을 적다가 "인생 망하더라도 영화 하다 망해보자"는 각오를 하고 대학원에 진학, 영화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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