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정강ㆍ정책에 있는 '보수' 표현을 삭제하는 문제를 놓고 치열한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이 "'나는 보수다'라고 찍고 가는 정당은 존재가 불가능하다"며 '합리적 보수 계승'이란 문구 삭제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단순히 문구 하나를 없애는 차원을 넘어 복지ㆍ대북 정책 등과 맞물린 문제인데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당의 존립 이유를 없애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서 격한 후폭풍이 예고되고 있다.
한나라당 비대위 정책쇄신분과는 5일 이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었지만 일단 결론을 유보하고 계속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참석자 과반 이상이 '보수' 용어에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가치 표현을 도입하자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앞으로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 주목된다. 삭제론자들은 "전 국민을 대변할 필요가 있고 2003년 정강에도 '보수'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반면 유지론자들은 "삭제할 경우 불필요한 이념 논쟁만 야기할 수 있다"고 맞섰다.
김종인 위원은 이날 "정당은 기본적으로 표를 먹고 사는 운명인데 특정 부류만 대변해선 국민정당이 될 수 없다"며 "보혁 싸움은 의미가 없는 만큼 보수 용어를 없애는 데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원희룡 의원도 라디오에서 "시대가 바뀌면 보수의 내용도 바뀌는 것"이라며 긍정적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쇄신파인 정두언 의원은 통화에서 "기득권에 매몰된 '무늬만 보수'를 고쳐야지 '보수'를 삭제할 문제가 아니다"며 "제대로 된 보수주의를 세우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자유교육연합 상임대표를 지낸 조전혁 의원은 "엄격한 아버지(보수)와 자애로운 어머니(진보) 두 역할 모두 중요한데 보수 철학 자체를 없애겠다는 건 어머니가 둘인 기형 가정을 만들자는 소리"라고 각을 세웠다. 전여옥 의원은 민주당 비례대표를 지낸 김종인 위원을 겨냥해 "스님이 교회에 와서 교회 개혁을 하겠다고 나서는 격"이라고 직격탄을 쐈다. 김용갑 당 고문은 "나라를 건국하고 발전시켜온 소위 '발전적 보수' 가치를 부정한다면 박정희 시대도 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논란에 대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비대위에서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 삶에 관한 정책을 먼저 내고 거기에 맞춰 정강ㆍ정책이 뒤따라가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한편 정책쇄신분과 위원인 권영진 의원은 "비대위가 새 통일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정강ㆍ정책에 유연한 대북정책 기조를 반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현재 정강에 규정된 '호혜적 상호공존 원칙' 수정은 물론 이명박정부의 '비핵개방 3000'과도 선 긋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비대위는 또 현정부의 성장주의 공약인 '747공약'(연평균 7% 성장, 1인당 소득 4만 달러 달성, 선진 7개국 진입)도 공식 폐기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재용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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