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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환자와 소통하는 '눈높이 의사선생님'이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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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환자와 소통하는 '눈높이 의사선생님'이 늘어난다

입력
2012.01.0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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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달라지고 있다. 가운 벗은 남방 차림으로, 청진기 대신 마이크를 들고, 수술실이 아니라 찜질방도 달려간다. 아픈 이들과 좀더 가까이 소통하기 위해서다. 수술 잘 하고 처방 잘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의사의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속 깊은 배려는 첨단의술이나 특효약 못지않게 환자에게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새해 국내 의료계를 이끌 화두의 하나로 한국일보는 '환자와 의사의 교감'이라는 뜻의 '라포르(rapport)'에 주목한다. 권위를 버리고 눈높이를 낮추면 환자도 마음을 열고 의사를 믿게 된다. 라포르 문화의 확산을 위해 이를 나눈 이들의 훈훈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의학지식 나누는 의사들

가정주부 임봉자씨. "유방암 수술 받은 지 벌써 10년이네요. 한쪽 가슴을 잃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목욕탕 가면 얼마나 창피했는지. 왜 나만 이런 일을 겪나 화도 치밀었지요. 뭘 먹는 게 좋은지, 어떻게 건강관리를 할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얼마나 많게요. 하지만 의사는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어렵고 어색하고 불편했어요.

같은 고민을 하는 환우들과 함께 용기를 냈지요. 벽을 허물어보자고 제안한 거에요. 하루 동안 찜질방을 통째로 빌려 마음껏 목욕하고 이야기도 나누는 거죠. 의사들도 와요. 똑같이 찜질복 입고 만나는 의사의 모습은 진료실에서와 전혀 다르지요. 자유롭게 물어보고 편하게 대답하다 보면 불안함도 점점 가셔요. 암 환자들이 우릴 부러워하던데요."

서울아산병원 안세현 유방암센터장. "매달 둘째 주 수요일 오전은 진료도 수술도 빼고 찜질방엘 가요. 8년째죠. 진료실에선 시간에 쫓기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는데, 찜질방엔 즐거운 마음으로 가요. 환자들이 궁금해하는 점들을 여러 명에게 한 번에 답해줄 수 있는 것도 장점이고요.

5년 전엔 병원 근처에 50평대 아파트를 융자 받아 마련했어요. 6개월 걸리는 방사선치료를 받으러 지방에서 올라온 환자들이 고시원이나 여관 전전하는 게 안타까워서 아예 그 아파트에서 지내게 했지요. 5~10명이 머물면서 하루 1만원씩 모아 관리비도 내고 끼니도 해결해요. 우리 의료팀이 2명씩 조를 짜서 한 달에 한 번씩 그 집엘 찾아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환자들이 궁금해하는 점을 상담해줘요. 시간요? 물론 많지 않아요. 그래도 비워야죠.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편하게 환자를 만나 충분히 얘기할 수 있는 기회도 중요하니까요."

과거에는 의사들의 의료정보 독점을 당연하게 여겼다. 사람들은 아플 때만 의사를 찾고, 의사는 치료해주면 그뿐이었다. 의사도 환자도 모두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이젠 시대가 바뀌었다. 의료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평균연령이 높아지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늘었다. 의사가 갖고 있는 정확한 지식이나 정보에 목말라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하지만 진료시간은 여전히 제한돼 있다. 최근 서울대병원과 국립암센터 공동 조사에 따르면 국내 암 생존자 2,556명 중 37.1%인 985명이 의사와 면담이 불충분하다고 답했다. 특히 젊은 환자나 여성 환자, 고학력 환자, 불안이나 우울함을 느끼는 환자일수록 그렇게 느끼는 경향이 강했다. 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신동욱 교수는 "최적의 치료를 위해선 환자의 주관적인 요구사항을 고려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면담시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치료하는데 수술이나 약이 전부가 아니라 정서적인 비중이 크다는 얘기도 된다. 뜻 있는 의사들이 일부러 진료실 밖으로 나가는 이유다.

치료 후에도 평생 주치의

전영명 소리이비인후과 원장. "지현이는 선천성 고도난청 때문에 5살 때 인공와우수술을 받았어요. 재활치료도 꾸준히 받아 말하고 들을 수 있게 됐고, 초등학교에도 입학했어요. 그런데 워낙 어릴 때부터 생긴 문제라 언어발달이 또래보다 좀 늦을 수밖에 없지요. 의사소통이 더디니 선생님과 친구들이 지현이를 마치 장애학생처럼 대했나 봐요. 지현이는 점점 자신감을 잃으며 학교생활에서 소외돼갔어요.

아이들 인공와우수술을 많이 하다 보니 지현이 같은 경우가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이들의 사회생활을 돕고 싶어 재활치료사, 심리상담사와 같이 특별한 캠프를 기획했어요. 인공와우 쓰는 아이들과 1박 2일 여행을 떠나는 거죠. 캠프에서 만난 지현이는 병원에서와 사뭇 달랐어요. 조용하고 얌전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활발했거든요.

캠프는 아이들의 소외감을 없애주는데 주안점을 뒀어요. 교실 안에선 짝꿍 이름 묻기도 주저하던 아이들이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금세 친해지던데요. 지현이 어머니는 지현이가 캠프에 참여한 뒤부터 눈에 띄게 밝아졌대요. 친구가 자기 말을 못 알아들을 때 예전엔 대화를 금방 포기했는데, 지금은 끝까지 의사를 전달하려고 애쓴다는 거에요."

퇴직 남성 황윤봉씨. "허리 통증에 다리 마비까지 와 걷질 못했어요. 허리디스크 파열이었죠. 척추전문 척병원에서 수술 받고 나았어요. 그 병원에선 '척페스티벌'이라는 완쾌환자 동창회를 하더군요. 처음엔 호기심에 참석했는데 지금은 '죽돌이'가 됐어요.

수술 전 입원했을 때 주치의 홍준기 원장이 일단 담배부터 끊어보자 권했는데, 척페스티벌에서 만날 때마다 그때 상황을 얘기하며 금연 잘 되고 있냐고 물어요. 벌써 5년 다된 일인데 기억해주는 거에요. 재발 방지 팁도 일러주더군요. 무거운 물건을 들 때 허리만 굽히지 말고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짐을 들고 무릎으로 일어나면 허리에 부담이 덜 간다고요. 치료 다 끝났는데 의사가 내 아픔을 기억해주고 계속 건강을 챙겨주니 참 고맙죠."

사회가 고령화하면서 치료 못지않게 건강관리나 예방에서 의사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환자뿐 아니라 건강한 사람도 평생 건강정보를 접하고 싶어한다. 이귀옥 한국헬스커뮤니케이션학회장(세종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은 "의사만의 힘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라며 "이런 변화가 의료커뮤니케이션이라는 영역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의료커뮤니케이션학은 의료정보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학문 분야다.

이 같은 변화를 의료계 한편에서는 곱지 않게 바라보기도 한다. 환자와 자주 만난다는 한 의사는 "동료들에게 가끔 너만 잘났냐고 싫은 소리도 듣는다"며 "의사로서 실력 쌓기보다 과외활동에 더 열심인 것으로 비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의료현실에 맞는 현실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환자가 '아는 의사' 되기

이재국 보아스이비인후과 원장. "2살짜리 꼬마 환자를 만났어요. 편도선염이 잦아 병원을 여러 군데 다녔는지 진료실만 들어오면 울더군요. 의사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 아예 가운을 벗었어요. 올 때마다 손등에 스티커를 붙여주고 치료를 잘 받으면 반지도 선물했지요. 아이 어머니가 너무 울어 진료받기 힘들었는데 제게 오니 안 운다며 계속 우리 병원을 찾았어요. 4살 때 수술로 많이 나아졌는데, 알레르기비염 때문에 유학 간 지금까지도 방학마다 찾아오네요. 최근 귀국했을 땐 손수 만든 곰돌이 의사 인형을 선물해줬어요. 우리 병원을 다니며 아이가 의사 꿈을 키운다고 하네요. 언젠가 저를 뛰어넘는 실력 있는 의사가 되겠죠. 그때까지 좋은 멘토가 돼주려고 해요."

가정주부 이미경씨. "소화 안 되고 설사가 잦아 소화기전문 비에비스나무병원엘 처음 간 게 2년 전이죠. 의사 첫인상이 딱 'KFC 할아버지'였어요. 나비넥타이가 멋지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더니 넥타이가 길면 균을 옮길 우려가 있어서 짧은 걸 맨다고 했어요. 친절한 답변이 고마워서 계속 다니다 보니 점점 가까워진 것 같아요. 요즘은 진찰이랑 관계 없는 것도 거리낌 없이 물어요. 나비넥타이가 30개 정도 있고, 넥타이를 처음 만든 나라가 크로아티아란 것도 들었어요. 방송에 간혹 나오면 내가 아는 의사라고 주변에 소개도 하지요."

많은 환자들이 의사 앞에서 위축되고 주눅 든다. 아픈 걸 고치는 사람 앞에서 아픈 사람은 대등한 입장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먼저 권위를 내려놓는 의사에게 환자들은 친근감을 느낀다. 흰 가운, 긴 넥타이와 격식 차린 정장, 딱딱한 말투 등은 환자에게 권위의 상징으로 비칠 수 있다. 민영일 비에비스나무병원장은 "사람 대 사람으로 환자를 대하는 겸손이 의사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 중 하나"라고 말했다.

우리 병원만의 소통 방식

직업군인 김종열씨. "무릎연골 파열로 관절전문 웰튼병원에서 수술 받았어요. 수술 당일 마취하고 나니 간호사가 헤드폰을 씌우고 클래식음악을 틀어주더군요. 가뜩이나 긴장된 상태에서 수술 준비하는 소리만 들리면 참 불안했을 것 같은데, 편안해진 느낌이었어요.

잠시 후 모니터가 켜지더니 난생 처음 보는 내 무릎 속 뼈와 연골이 나타났어요. 송상호 원장이 여기가 연골, 여기가 인대라고 가리키면서 수술과정을 실시간으로 설명해줬어요. 이 병원은 수술실 밖에서 보호자도 수술 생중계 장면을 지켜볼 수 있게 돼 있어요.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배려, 실력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믿음이 생겼죠."

김은경 비앤빛 강남밝은세상안과 원장. "진료실에서 시술방법이나 약 처방 등 꼭 필요한 설명을 다 했는데 환자가 머뭇거린다 싶을 때가 있어요. 뭘 물어보고 싶은데 차마 말을 못 꺼내는 눈치에요. 그래서 점심시간이나 진료 사이사이 짬을 내 스마트폰으로 환자들과 카카오톡을 시작했어요. 어떤 분은 라섹수술 후 사물이 겹쳐 보인다며 걱정을 하더군요. 사실 일시적인 현상이거든요. 라식수술보다 회복이 좀 늦죠. SNS 상담을 하면서 의사 입장에선 당연한 내용들을 생각보다 많은 환자들이 궁금해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시력교정술 후 색조화장은 언제부터 해도 되나 같은 사소한 질문도 진료실에선 꺼리지만 문자로는 스스럼없이 하세요."

수술 전 과정을 공개하는 생중계나 의학정보를 글로 쓰는 과정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문자상담은 의사에게 사실 부담이다. 그럼에도 의사에게 직접 설명을 듣는 환자로선 만족도가 높다. 이런 경험을 한 환자들이 내는 입소문은 병원 마케팅에도 도움이 된다. 강남밝은세상안과 관계자는 "여러 안과병원에서 최근 의사들 문자 상담을 시작했다"며 "기업의 고객만족(CS) 개념이 개원가로도 확산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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