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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한국사회에 묻다] (5.끝) 이젠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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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한국사회에 묻다] (5.끝) 이젠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건가요?

입력
2012.01.0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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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곤하게 태어나면 교육까지 빈곤… 출세할 기회가 없다

1989년 2월 서울 D고교를 졸업한 박상원(가명ㆍ42)씨와 이성훈(가명ㆍ42)씨. 박씨는 등록금을 제 때 내는 건 고사하고 도시락마저 못 가져오는 날이 많아 수돗물로 배를 채웠을 정도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반면 이씨는 아버지가 중견기업 대표였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교 졸업 23년이 지난 현재 두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과연 부모의 경제력은 두 사람의 인생항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박씨는 중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고 노점상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 수입으로 3형제를 가르치고 먹이는 건 쉽지 않았다. 장남인 박씨는 신문배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교를 다녀야 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과외가 금지된 시절이라 학교 수업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우등생이 될 수 있었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그는 대학에서도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의 학비와 용돈은 물론 동생들 학비까지 댈 정도로 밤낮없이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1996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지금 10여명의 변호사를 둔 로펌을 운영 중이다. 박씨는 "불과 20년 전만 해도 열심히 살면 누구나 계층이동이 가능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이씨의 학창시절은 누구보다 풍족했다. 정부가 과외 금지령을 내린 시절이었지만, 자녀에게 비밀과외를 시키는 부유층도 많았다.

이씨도 고교 시절 국어 영어 수학 등의 과외를 했고, 서울 중위권 대학에 무난히 진학했다. 대학에 들어가선 미국, 호주, 유럽 등 가보지 않은 국가가 없을 정도로 해외여행을 즐겼고, 졸업 후 아버지의 도움으로 여행사를 차렸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여파로 아버지 사업이 타격을 받으면서 돈줄이 끊기자 여행사는 바로 문을 닫았고, 지금은 소규모 골프전문 여행사에서 영업을 맡고 있다.

20~30년 전 대한민국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였다. 누구나 의지와 노력만으로 명문대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12년 지금, 명문대 입학생은 물론 과거 자수성가의 대명사였던 고시 합격자 중에도 저소득층 출신을 찾기란 쉽지 않다. 명문대 수석 합격자가 학교 수업만 충실히 했다는 기사는 옛말이 된지 오래다. 소득 양극화가 교육 격차를 부르고, 이는 부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구조가 고착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8월 서울 모 여대를 졸업한 박정현(가명ㆍ23)씨. 법학전문대학원 시험에 한차례 낙방한 후 올 8월로 예정된 시험을 다시 치르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있다. 여느 대졸 백수와는 달리 그는 여유만만하다. "취업 걱정은 하지 않아요. 지방에서 외과병원을 하는 아버지가 합격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신다고 했어요."

그는 대학 시절에도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이 없다. 임대료 관리비 등을 합쳐 월 100만원 이상 드는 고급 원룸에 거주하며 해외연수, 요가, 중국어, 인턴활동 등 스펙 쌓기에만 열중했다.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법조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지난해 사립 명문대에 입학한 이승희(가명ㆍ21ㆍ여)씨. 최근 아버지를 여읜데다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 일을 전혀 못하다 보니, 입학과 동시에 아르바이트 인생이 시작됐다. 월세와 생활비,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부터 패스트푸드 점원까지 매 학기 4, 5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차상위계층이라 일부 장학금이 나오지만 일정성적(평점평균 3.0 이상)을 유지해야만 해 학업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지난해 6월 부족한 잠과 부실한 식사로 편도선, 장염 등 잔병에 시달리다 기말고사를 잘못 치러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아르바이트 비용은 가족 생활비로 들어가 연간 70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휴학 기간은 길어야 1년입니다. 그 동안 등록금을 벌지 못하면 결국 제적당하는데, 그럼 제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체제가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완전히 끊겼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과외금지 기간(1980~2000년) 동안 중ㆍ고교를 다닌 세대가 하위계층에서 상위계층으로 올라선 확률이 현재보다 7.3%포인트 높았다.

이는 서울대 입학생의 부모 직업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신입생 중 아버지가 농ㆍ축ㆍ수산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전체의 1.7%로 1998년(4.7%)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아버지가 고졸인 입학생의 비율도 2004년 24.1%에서 2010년 16.7%로 매년 줄어드는 추세다.

박순용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는 "건강한 사회일수록 계층이동 통로가 열려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부의 편중이 심해 계층이동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취약계층 청소년들이 균등한 교육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태훤기자 besame@hk.co.kr

박관규기자 ace@hk.co.kr

■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말하는 '해법'

열심히 노력해도 계층이동이 안 되는 사회는 갈등과 분열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2012년 한국 사회가 바로 그렇다. 부모의 경제력, 즉 사교육비 지출 능력의 차이가 학력 격차를 낳고, 이는 다시 자녀 세대의 소득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무너진 계층이동 사다리를 복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운찬(사진) 동반성장위원장에게서 해법을 들어봤다. 그는 총리 재임 시절 '공교육 개혁'을 국정 최우선 순위에 놓았고, 서울대 총장과 교수 시절 지속적으로 교육개혁을 추구해 왔다.

정 위원장은 '계층 이동 사다리'가 급격히 무너지는 상황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기성세대의 의식개혁을 통해 교육기회 불균형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의식개혁'을 먼저 꺼낸 이유는 우리 학부모들이 이율배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학부모들이 ▦남들이 다 과외를 하니 어쩔 수 없이 따라 한다 ▦최소한 대학은 나와야 한다 ▦나중에 자식에게 과외 못 시켰다는 원망을 듣고 싶지 않다는 공통된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자녀들을 사교육에 내몰면서도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이제라도 우리 사회가 경쟁이 전부가 아니며, 학력이 구직의 최우선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며 "기업과 공공기관이 학력차별 철폐에 앞장서고, 허울뿐인 자격시험들을 없애야 공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공교육 개혁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진단했다. 다양한 전문 직업인을 양성할 수 있도록 고교를 다양화하고 대학 입시에서 학력요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대학입시는 내신, 수능점수, 각종 외국어 점수 등 소위 '스펙 쌓기'사교육만 조장하는데, 고교를 다양화하고 대입에서 학력요건을 완화하면 과외를 통한 선행학습이 더 이상 효과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다리 복원을 위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는 고용 안정이다. 직업을 구하지 못해 절대 빈곤으로 떨어지는 가계가 많아지고 중산층이 줄어들면 사다리 복원은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용 안정을 위해서는 대기업의 상생 경영이 필수적이다. 그는 "대기업이 무한경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우리 사회에 강요하고 있지만, 대기업도 정부의 지원 덕분에 오늘에 이른 것을 인식해야 한다"며 "지금처럼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기업 생태계 자체가 파괴되는 상황을 외면하면 결국 공멸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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