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선배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둘 다 사는 곳은 일산, 각자의 일터는 서울과 파주. 다섯 시 언저리쯤 일산에서 보자고 전화를 했더니만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선배. 나 걸어가는 중이야. 대략 한 세 시간쯤? 머릿속이 복잡할 땐 그저 이렇게 걷는 것이 최고야.
무념무상. 힘들다고 말하면 엄살이고 괜찮다고 말하면 체념이 아닐까 싶은 순간에 나 역시도 괴롭히는 건 내 몸뚱이뿐이다. 얼마 전 찾아든 청도에서 나는 묵었던 숙소 앞에 지천으로 떨어져 나뒹굴던 모과를 한 서른 개쯤 이고 왔다. 씻고 닦고 썰고 설탕에 재어 누르스름한 모과로 꽉 들어찬 5킬로그램짜리 과실주 두 병을 베란다에 옮기기까지….
근 네 시간에 걸쳐 나는 일체의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못생기고 단단한 모과만을 생각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과차를 나눠줄 여럿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틈틈 포스트잇에 메모한 게 나였으니 말이다. 사랑하다 미워지면 욕을 하고 욕을 하니 미안해져 더더욱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라는 원이 그리는 바로 그 정이라니.
어떤 시트콤에서 한 남자 배우가 '생각 중'이라는 담요를 뒤집어쓴 걸 보았다. 가족으로 분한 누구 하나 담요를 걷어내는 일 없이 침묵 속에 그의 생각을 기다려주는 풍경이 꽤나 신선했다. 보다 깊은 생각을 권하기 전에 보다 깊이 생각할 시간부터 할애하기. 아깝다. 시무식 때 이 얘기 하는 건데.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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