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인 알랭(박지일)과 재테크 컨설턴트인 아네트(서주희) 부부가 생활용품 도매상 미셸(이대연)과 다큐멘터리 작가 베로니끄(이연규) 부부의 집을 찾았다. 두 집의 아들이 싸웠기 때문이다. 일면식도 없던 두 부부는 언뜻 행동이 교양있다. 아들의 이빨이 부러졌건만 베로니끄는 손님을 위해 파이를 내오고, 아네트는 우아한 말투로 연신 사죄의 뜻을 밝힌다. 하지만 순조로운 대화가 유지되는 것은 막이 오른 후 초반 15분여 정도. 알랭은 휴대전화가 울리자 파이 먹던 손을 소파에 쓱 문질러 닦는다. 순간 억지스런 미소를 짓던 안주인 베로니끄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이어질 폭력을 예고한다.
연극 '대학살의 신(God of Carnage)'은 무시무시한 제목과 달리 사소한 사건을 통해 지식인의 허위를 꼬집은 코미디다.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는 전쟁터뿐 아니라 서로 소통하지 않는 현대인의 일상에도 학살의 신이 존재한다고 봤다. 특히 작가는 전작 '아트'에서 그랬듯 통상 식자층으로 분류할 직업을 가진 캐릭터에 더 강한 폭력성을 부여하고 있다.
계속되는 휴대전화를 통해 알랭은 부도덕한 제약회사를 변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전혀 거리낌이 없다. 갑작스런 구토 증세로 아네트는 거실에 음식물을 게워내고 만다. 아프리카의 유혈 사태에 몰두해 있다는 베로니끄는 아네트가 보는 앞에서 토사물이 묻은 예술서적을 헤어 드라이기로 말린다. 미셸은 가장 온순한 듯 보이지만 딸의 애완동물인 햄스터를 고민 없이 내다 버린 인물이다.
가식과 허영이 벗겨지면서 애들 싸움은 결국 어른 싸움으로, 말싸움은 몸싸움으로 변한다. 소파와 그림, 예술서적과 화병 등으로 깔끔하게 꾸민 무대는 아네트가 내동댕이쳐 버린 화병의 꽃과 토사물 등으로 그야말로 '대학살의 신'이 지나간 듯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2009년 토니상 최우수 연극상 수상작으로 2010년 국내 초연됐다. 관록 있는 대학로 대표 배우들의 합이 잘 맞는 코미디이면서 풍자성도 놓치지 않아 세대 구분 없이 공감을 얻을 만한 작품이다. 연출 한태숙. 2월 12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1544-1555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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