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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한국사회에 묻다] 3. 정글의 법칙과 약자 보호, 어느 것이 공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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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한국사회에 묻다] 3. 정글의 법칙과 약자 보호, 어느 것이 공정할까

입력
2012.01.0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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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업 "돈 좀 된다 싶으면…" 中企개발 기술 홀라당

"발 한번 잘못 디뎠다가 늪에 빠진 기분입니다."

공간정보통신 전문기업 A사의 김모 대표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15년 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지리정보시스템(GIS) 분야에 뛰어들어 난공불락 같던 외국 제품의 벽을 뛰어넘는 데에 청춘을 바쳤던 그는 "대기업의 횡포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김 대표는 벤처업계에선 꽤 유명인사다. 국내 GIS 분야 개척자인 그는 구글어스보다 7년 앞서 세계 최초로 웹3D GIS를 개발했다. 도로명주소 데이터베이스, 서울시 GIS포털, 국가지리유통망 등 대부분의 국내 GIS 관련 공공서비스는 이 회사의 기술로 탄생했다.

승승장구하던 김 대표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지난해 초. 정부의 도로명주소 정보화사업에 참여하면서 대기업 B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좀 더 쉽게 가자는 생각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수주에 성공하자마자 B사는 수익의 70%를 주겠다며 써준 확인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고 업계 관행에 따른 중도금 지급도 거부했다. 게다가 작년 9월 갑작스레 막대한 사업비용까지 청구했다.

이 때문에 A사는 급여조차 제 때 지급하지 못하면서 100명이 훨씬 넘던 직원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그런데 이직한 직원들 대다수가 B사와 우호관계에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업계 관계자는 "전형적인 중소기업 죽이기 사례"라며 "대기업들이 유망한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을 흔들어 싸게 인수하거나 인력을 빼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0년대 초 음악파일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주목해 MP3 플레이어 종주국 신화를 일궈냈던 중소기업들 역시 지금은 상당수가 문을 닫은 상태다. 한 때 세계시장을 제패했던 아이리버조차 명맥

정도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업계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애플 아이팟과 경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이들 중소기업에게 직격탄을 날린 건 국내 대기업 C사였다"고 했다. 초반에 시장성이 없다며 한발 물러서 있던 C사가 중소기업들의 성공을 보고 뒤늦게 뛰어들었는데 품질 경쟁보다는 저가공세와 자사 전자제품 구매시 끼워팔기 등 시장장악에만 열을 올렸다는 것. 이 관계자는 "막대한 자금력과 판매망을 가진 대기업이 출혈을 감수하고 덤비면 어떤 중소기업이 견딜 수 있겠느냐"면서 "그 때 우리들끼리 만나면 서로를 '루저'(패배자)라고 불렀다"고 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 55%였던 10대그룹 계열사의 경제력 집중도는 2010년에 75.6%까지 급증했다. 중소기업의 설 자리는 그만큼 줄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같은 변화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정한 룰 속에서 경쟁한 결과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우리의 시장 현실에선 자금력과 조직력을 앞세운 대기업의 일방통행이 작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기업 계열 대형 유통업체들의 횡포에 휘둘리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서울 관악구 성현동 봉오시장에서 20년째 채소가게를 운영해온 백모(58)씨는 지난해 말 결국 가게 문을 닫기로 했다. 백씨는 "3년 전 길 건너편 상가건물 건너 지하에 대형 슈퍼마켓(SSM)이 들어섰을 때부터는 그냥 용돈벌이 하는 수준이었다"면서 "처음에는 몇몇 채소만 팔더니 작년부터는 이것저것 다 팔기 시작하고 틈만 나면 할인행사를 해대는 통해 이젠 단골손님들의 발길도 거의 끊겼다"고 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176㎡(약 55평) 규모의 슈퍼마켓을 운영중인 한모(43)씨는 "재작년부터 주변에 SSM이 차례로 세 개나 들어서면서 매출이 30%로 줄었다"면서 "대기업이 운영하는 SSM이랑 우리 같은 자영업자를 똑같은 조건이니 알아서 경쟁하라고 내모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전국 재래시장의 매출액은 총 9조3,000억원이 감소한 반면 대형마트의 매출은 9조4,000억원이 늘었다. 재래시장에서 줄어든 매출이 고스란히 대형마트로 갔다는 얘기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 중기 적합업종 선정 왜 어렵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약육강식의 정글에 풀어놓는 건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인 틀을 만드는 건 당연하다."(임성호 백천세척기 대표)

"한국보다 중소기업 보호 제도가 적은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더 강력한 중소기업 대국으로 성장했다." (임상혁 전국경제인연합회 본부장)

모두가 공정경쟁을 말하지만, 정작 공정경쟁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를 보장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공감대가 없다. 지난해 내내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은 공정경쟁을 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시각차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규제하는 것이 공정경쟁의 출발점이라고 보는 반면, 대기업은 그런 접근 자체가 불공정하다고 반박해 왔다. 시각차가 이렇게 크다 보니 적합업종에 대한 합의도출은 거의 불가능했고, 사사건건 갈등만 불거졌다.

동반성장위원회는 지난해 9월부터 3차례에 걸쳐 두부 김치 세탁비누 순대 등 80여개 업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LED 레미콘 등 상당수 품목들은 합의가 되지 않은 채 어정쩡한 권고만 내려졌다. 지난달 열린 10차 전체회의는 전경련을 비롯한 대기업측이 전원 불참하면서 '반쪽회의'로 전락하기도 했다.

지금 상태라면 적합업종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따지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힘 없는 동반성장위는 정권말로 접어들수록 더 맥을 못 출 것이고, 이에 비례해 대기업 반발강도는 점점 더 거세질 전망이다. 동반성장위는 앞으로 제조업 뿐 아니라 유통 서비스 분야에서도 적합업종 지정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벌써부터 회의론이 비등한 상황이다. 유광수 중소기업중앙회 동반성장실장은 "적합업종 선정을 둘러싼 갈등은 우리 산업계 전체가 풀어야 할 숙제"라며 "그나마 공정경쟁의 원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것 자체가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 공정경쟁 '룰'은 있는데… 정부 무딘 규제… 법규 집행의지가 관건

전문가들은 공정경쟁 토대를 만들기 위해선 정부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공정거래법이나 하도급법, 상생법, 유통법 등 현재 구비된 법규만 제대로 적용해도 공정경쟁 토양은 한층 비옥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 박선숙 의원은 "현 정부 들어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도가 급격히 높아지고 부당 내부거래도 급증했지만 실제 처벌로까지 이어진 경우는 역대 정부 들어 가장 적었다"면서 "시장이 공정하게 운용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정부 그 중에서도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동반성장위원회 관계자는 "지난해 입법화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기업의 우월적인 지위 남용으로 인해 중소기업들이 피해를 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많은 배상액을 물리는 만큼 지금까지 처벌조항이 미미해서 바뀌지 않았던 여러 관행들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지적재산권을 적극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상당수 중소기업들이 대기업과 거래할 때 특허공유를 요구 받는 경우가 많은데, 대기업이 자회사나 관계회사를 통해 이를 활용함으로써 결국은 해당 중소기업이 문을 닫는 경우가 많기 때문.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특히 기술의 파급력과 발전 속도가 빠른 IT분야에서는 기술임차보증제도 등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현재 시행중인 사업조정제도와 관련, 강제성 확보와 심의ㆍ의결 시간 단축 등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SSM의 무분별한 확산을 막고 동네상권을 보호한다는 취지임에도 실제로는 권고성격이 강하고 조정안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제 기능을 못한다는 것. 실제로 전국 각지에서 SSM의 입점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법적 분쟁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지난해 말까지 이 제도로 중재가 이뤄진 경우는 20여건에 불과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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