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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 진지하게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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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 진지하게 싸워라

입력
2012.01.0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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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오래 전 두어 번 사적으로 만나 밥 먹고 대화한 적이 있다. 그 뒤 공적 자리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인연을 이어가다가 어느 날 우연찮게 멀어졌다. 그에 대한 기억을 어쭙잖게 얘기하다가 자칫 고인을 기리는 이들에게 욕 들을 게 걱정스럽다. 그래도 어설픈 새해 전망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처음 만난 건 1993년 YS 정부 출범 직후다. 베를린 특파원에서 돌아온 내게 연락이 왔다. 독일 통일과 동구권 체제전환 과정의 이념적 논란 등을 다룬 글을 관심 깊게 읽었다고 했다. 그 무렵 그는 제도권 정치 참여를 모색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의 이력을 잘 알기에 정치와 거리 있는 나를 만나자는 게 의아했다.

고 김근태와의 '자본주의 대화'

늘 반듯하고 진중한 인품을 새삼 덧붙여 말할 것은 없다. 지금껏 기억에 남은 건 현실사회주의를 이긴 서구 자본주의의 갈 길을 논한 프랑스 학자 미셸 알베르의 얘기에 유난히 귀 기울이던 모습이다. 경제학을 공부한 진보 인사에게는 공연한 수다로 들릴 수 있는 데도 독일어 판 책 제목까지 메모했다. 그저 예의치레이겠거니 하면서도, 진지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그 뒤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에 오른 그와 불편하게 헤어졌다. 2004년 탄핵 정국 속 총선 유세에 나선 그가 인천 앞바다 실미도를 찾아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박정희 정권의 인권 유린에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한 것이 빌미가 됐다. 그 뉴스를 보고 곧장 전화를 걸어 대뜸"김근태가 이제 와서 박정희와 박근혜를 걸고 들어가는 것은 퇴행"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늘 침착한 그도 황당했는지 몇 마디 응대하다 서둘러 작별했다. 그 며칠 뒤 칼럼에서"자신들의 일은 무엇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부모 세대의 키 작은 것을 흉보는 김근태와 동지들은 자신들이 다 고만고만하게 키가 작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썼다. 실미도 시절의 각박한 남북대치 현실과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 등은 모두 외면한 채, 32년 전 비극을 시대착오적인'민주와 반민주'구도싸움에 이용하는 위선을 나무라고 싶었다.

지극한 고통을 준 독재와 '후계세력'을 비호하는 걸로 여겼을까. 그렇게 멀어진 김근태는 정치적 성취를 이뤘다. 2008년 총선에서 좌절한 데 이어 건강마저 잃고 아주 작별하게 됐지만,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용기와 인품을 기리는 조문 행렬은 그의 삶이 정치적 잣대로만 가늠할 수 없는 큰 성공이었음을 일깨운다. 그러나 연말 부음을 듣고 빈소를 찾으려다가 포기했다. 30여 년 전 그가 겪은 처절한 고통을 자신들의 것 인양 되뇌면서"2012년을 점령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하는 모습이 끝내 걸렸다.

한때 골수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김근태가 현실정치에서 부침하는 사이, 유럽의 자본주의 논쟁도 우여곡절을 거듭했다. 미셸 알베르는 시장규제 완화와 금융경제를 앞세운 영미식 자본주의보다 사회적 시장경제에 기반한 독일식 모델이 우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영미와 유럽, 또 나라마다 다른 토양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하던 자본주의는 근본적 위기론을 만났다. 동시에 정치와 국가가 모두 실패했다는 민주주의 위기론이 그야말로 악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참되고 착실한 정치의 모범

위기에 처한 유럽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위기를 함께 논란하는 바탕은 그 둘과 복지의 토대인'사회적 국가'가 평화와 안정의 삼각 지지대라는 인식이다. 미국도 극우 티파티 세력과'월가 점령'운동이 저마다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외치지만, 서로 얽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원칙을 달리 볼 뿐이다. 유독 우리 사회는 둘을 떼놓고, 특히 정치세력은 모든 걸 민주주의 투쟁으로 바꾼다.

김근태를 깊이 알지 못하면서'자본주의 대화'를 얘기한 것은 사회와 정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 참되고 착실한 모습이 생각나서다. 그처럼 진지하게 싸워야 한다.

ㅊ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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