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가 여의도를 점령했다. 지난해 연말 방송사 연기상은 모두 '영화배우' 차지였다. 탤런트와 영화배우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지 오래지만 SBS와 KBS 연기대상을 거머쥔 한석규('뿌리깊은 나무'), 신하균('브레인')은 영화가 아니고는 만나기 힘든 충무로 배우들이었다. 고현정 장혁 김남주 한효주 등 재작년 대상 수상자가 모두 TV를 주무대 삼은 '탤런트'였던 것과 대조된다. 안방극장 관객들이 영화배우들에 열광하는 건 왜일까.
"식상한 연기만 보다가 평소 보기 힘든 영화배우들의 열연을 접하니 드라마 볼 맛이 나요." 40대 회사원 김종훈씨는 요즘 TV드라마에 푹 빠져 있다. '뿌리깊은 나무'와 '브레인'을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챙겨봤다는 그는 "요즘 드라마는 어지간한 영화보다 재미있고 완성도도 높다. 특히 한석규, 신하균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한글창제를 소재로 한 사극 '뿌리깊은 나무', 신경외과 전문의들의 사랑과 야망을 그린 '브레인'의 인기의 중심에는 한석규와 신하균이 있다. 세종(한석규)은 어릴 적의 트라우마에 힘겨워하고 욕설을 서슴지 않는 예민한 성격이면서도 농담과 장난을 즐기는 복합적인 캐릭터다. 성공만을 추구하는 냉혈한이지만 어머니를 진심으로 위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의사 이강훈(신하균) 역시 다면성을 지닌 인물이다. 미세한 감정 변화까지 세밀하게 표현해내는 두 배우의 연기는 강력한 파토스로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흥미로운 건 두 배우 모두 최근 영화 출연작들의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가운데 드라마를 통해 재평가 받았다는 점이다. 한석규는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와 '이층의 악당'(2010)의 흥행 부진을 겪은 뒤 1995년 '호텔' 이후 16년 만에 드라마로 돌아왔다. 영화 '페스티발'(2010) '고지전'(2011) 등에 출연했던 신하균은 2003년 '좋은 사람' 이후 8년 만에 지상파 드라마에 출연했다. 돌파구가 필요한 상태에서 두 배우는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방향을 틀어 잭팟을 터트렸다.
한석규는 SBS 연기대상 수상소감에서 "배우가 되는 데 중요한 세 가지는 희곡(대본), 무대, 관객"이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좋은 대본과 제작진이 있기에 배우들이 영화보다 드라마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구본근 SBS 드라마센터장은 "연출자들이 연기력이 뛰어난 영화배우들을 기용하면서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졌다"며 "좋은 대본과 영화 이상의 출연료 등으로 인해 요즘엔 영화에 주로 출연하던 배우들도 드라마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영화를 주무대로 활동하던 배우들이 드라마에서 두드러진 연기력을 보이는 원동력은 장르적 특성에 있다.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 배우들이 캐릭터와 연기에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일 수 있다. 때문에 오랜 기간 영화에 출연하며 경험을 쌓은 배우들은 드라마 현장에서도 짧은 시간에 연기력을 뽑아낼 수 있다. '브레인'을 제작하는 CJ E&M의 배익현 팀장은 "캐릭터를 섬세하게 해석하고 대본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는 배우는 영화든 드라마든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고 말했다.
TV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가 더 뛰어나 보인다는 견해도 있다. 한석규나 신하균처럼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은 자신의 재능을 70%만 보여줘도 시청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영화제작자는 "드라마 배우들의 틀에 박힌 연기만 보다가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차이를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영화배우'의 드라마 진출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배우들의 스타성보다 연기력에 초점을 맞추는 제작자와 연출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MBC의 한 PD는 "주연은 물론 조연을 캐스팅할 때 스타성이 높은 배우보다 인지도가 다소 낮더라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에 무게를 두는 제작자나 연출자가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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