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본 뒤 문득 떠오른 문구다. 정지영(66) 감독과 주연배우 안성기(60)는 맥아더의 그 유명한 말을 변형시켜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충무로에선 '회춘했다'는 질시 어린 우스개도 흘러나온다.
경륜의 힘을 보여준 두 사람을 지난달 29일 서울 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하얀 전쟁'(1992) 이후 20년 만에 카메라를 매개로 다시 의기투합한 이들은 허물 없이 서로를 대하며 종종 파안대소했다. 19일 개봉하는 '부러진 화살'은 정 감독이 '까'(1998) 이후 14년 만에 내놓은 장편영화다.
'부러진 화살'은 몇 년 전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석궁 교수 사건을 다룬다. 부당한 재임용 탈락에 대해 법정싸움을 하다 패소한 뒤 석궁을 들고 판사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더 큰 곤경에 처하는 김경호(안성기) 교수의 사법부를 향한 고군분투가 중심이다.
'우리나라 법은 완벽한데 판사들이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생각에 독학으로 재판부와 검사의 논리에 맞서며 법정을 장악해 가는 피고인 김 교수의 모습이 매력적이다. 권위적인 사법부에 직격탄을 쏘는 김 교수의 투쟁은 경륜보다 패기를 더 높이 사고, 연기보다 외모를 더 선호하는 충무로 세태에도 통렬한 한방을 날린다.
당초 '부러진 화살'의 제작비는 1억원이었고, 안성기의 캐스팅은 생각지도 못했다. 문성근에게서 동명 르포소설을 추천 받은 정 감독은 은근히 그의 출연을 기대했다. 하지만 문성근의 출연이 무산되면서 정 감독의 눈은 "연극하는 B급 배우 정도"로 향했다.
정 감독은 "누군가 '안성기가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독립영화 '페어 러브' 출연도 했다'고 말해줘 출연 제안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안성기는 "영화적 가치가 충분해 출연을 결정했다.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얇았는데 그만큼 이야기가 잘 정리돼 있었다"고 화답했다. 안성기가 합류하면서 제작비는 다섯 배로 덩치를 키웠다. "안성기가 캐스팅되면서 최소한의 대중영화 성격은 갖춰야 했죠. 물론 그 덕분에 스태프들 구성도 쉬워졌어요."
영화 속에서 김 교수는 권위로만 몰아붙이는 판사와 검사의 행태를 법 조항으로 조목조목 반박한다. 법정의 최약자이기 마련인 피고가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라며 재판부를 통박하는 모습 등에서 묘한 통쾌함과 함께 웃음이 밀려든다. 정 감독은 "영화 속 캐릭터가 아마 안성기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배우라면 도전해서 구현해보고 싶은 캐릭터"라고 말했다.
영화 속 검사와 판사는 형량을 구형하고 판결을 하면서도 적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법리도 허술하기만 하다. 정말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법정 장면은 전혀 꾸미지 않았다는 게 제작사의 입장. 안성기는 "시나리오를 읽고선 어떻게 이런 일이 있냐는 생각에 '일부러 꾸민 거 아니냐'고 가장 먼저 물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법리공방이) 허술해서 외국에선 공감을 못한다. 해외 영화제에서 안 받아줄 듯하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남부군'(1990)과 '하얀 전쟁'에 이어 세 번째로 호흡을 맞췄다. 우연찮게도 당대에 금기시되던 소재를 스크린에 옮긴 사회성 짙은 영화들이었다. 정 감독은 "내가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두렵겠냐"고 반문했다. 안성기는 "정 감독님과는 어려운 환경에서 영화를 찍어왔는데도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든다"며 정 감독에게 힘을 실어줬다.
두 사람은 '남부군' 촬영 당시 부당한 법 집행을 경험하고 목도하기도 했다. 미국 영화사 직배 반대 투쟁을 하던 정 감독은 촬영 중 형사들에게 연행됐다. 직배영화 상영 방해를 위해 극장에 뱀을 푼 사건 배후에 정 감독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내일 하루만 더 찍게 해달라"는 정 감독의 하소연에 대한 형사들의 응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지영 감독 구속'으로 신문 기사가 나갔다. 신문이 거짓말 하면 안 된다. 당신이 이렇게 (구치소) 밖에 있으면 안된다."
정 감독은 '부러진 화살'에 대한 호평을 발판 삼아 조심스레 다음 행보를 준비 중이다.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과 광주민주항쟁 이야기, 사극 한편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안성기는 '부러진 화살'과 같은 날 개봉하는 '페이스 메이커'로도 관객들을 만난다. 두 사람의 전성기는 이미 다시 시작됐는지 모른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