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父子)가 소박한 새해 소망을 꺼내놨다. 지난해 말 화재로 동생(18)을 잃은 박우석(20)군은 "좋은 직장 가서 돈 많이 벌어서 다른 가족들처럼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2012년 연말에는 적은 금액이라도 기부해 내가 받았던 도움을 이웃에 되돌려주고 싶답니다." 그게 아버지 박종락(52)씨의 소망이었다.
화마의 기억은 아직도 이 가족을 붙들고 있었다. 지난달 12일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3평 남짓한 판잣집에서 난 불로 시각장애가 있던 박씨의 둘째 아들이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숨졌다. 네 식구가 겨우 기대 살던 집도 잃었다. 난방비를 아끼려 낚시용 미니 난로를 사용한 게 화근이었다.
박씨는 아직도 아들 얼굴이 떠올라 옛 집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우석군은 "밤에 자려고 누우면 눈 앞에 훨훨 불타는 집이 보인다"고 했다. 중증 치매에 걸린 박씨의 어머니(84)는 늘 옆에 나란히 누워있던 손자가 어디 갔는지도 모른 채 밥 때만 되면 손자를 찾는다.
그러나 가족들은 조금씩 힘을 내고 있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덕분이다. 장례를 마친 뒤 오갈 데가 없어 누나 집에 얹혀 살던 박씨 가족에게 하월곡동 주민센터 사회복지사들이 성북구 삼선동 임대주택 입주를 주선해준 것. 복지사들이 지역 후원회 십여 군데를 뛰어다닌 덕분에 임대 보증금 800여만원을 마련했다. 가족들은 4일 이사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한 정보산업고를 졸업한 우석군은 서일대학 정보통신학과에 합격, 평소 관심을 가졌던 휴대전화 관련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사실 동생 장례를 치르던 중 받은 합격 통지서라 우석군은 "당시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면 올해 자격증을 적어도 다섯 개는 따야 하고, 학점 잘 받아서 전액 장학금도 타야 해요. 아르바이트로 용돈도 벌어야 하구요."
아버지 박씨는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됐다. 몇 년 전부터 둘째 아들의 장애가 부쩍 심해지고 노모의 치매도 악화되면서 가족을 돌보느라 일조차 못했던 박씨다. 그러나 곧 어머니가 노인장기요양보험 3급 판정을 받으면 요양사가 매일 어머니를 돌봐줘 박씨도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박씨는 "이달 말 어머니의 최종 심사 결과가 나오는데, 요양사만 오면 바로 일자리를 찾을 계획"이라며 "하늘에 있는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걱정이 하나 남았다. 여느 평범한 가정에도 부담이 되는 대학 등록금 문제가 박씨 가족에게도 안겨졌다. 우석군의 첫 학기 입학금과 등록금은 400여만원. 장학금과 대출금을 알아봤지만 아직 입학도 하지 않은 우석군이 장학금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등록금 납부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박씨는 "아들이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지금 속이 시커멓게 탔을 것"이라며 "어떻게든 마련해서 대학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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