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대 성장 10년 이상 계속"… 현실을 직시해야 해답도 보여
2012년 성장률 전망은 정부나 민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대략 3.3~3.7%. 2011년(3.8% 추정)에 이어 2년 연속 3%대의 낮은 성장이다. 유럽재정위기가 수습되면 어느 정도 반등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과거 같은 5%대 이상 성장은 이제 구조적으로 힘들어 보인다. 고성장시대의 폐막, 그리고 저성장시대의 개막. 이는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그런만큼 오랜 고성장에 길들여진 체질과 사고·행동방식을 하루빨리 바꿔나가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시대로 연착륙하기 위해 경제주체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심층 진단해 본다.
장사가 잘돼 하루 매상이 10만원씩 늘다가 7만원, 5만원으로 줄기 시작했다면? 아이의 키가 초등학교 때는 매년 10㎝씩 컸는데 중학교에 가더니 5㎝ 밖에 크지 않았다면?
물론 걱정은 되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한 일. 매상도 키도 계속 같은 폭으로 늘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1970~80년대엔 두자릿수의 초고도 성장을 거듭해왔던 한국경제는 90년대 들어 외환위기(1997년) 이전까지 7% 전후로 성장률이 낮아졌고 2000년대 들어선 4~5% 안팎까지 둔화됐다. 가게매상이나 아이들의 키처럼 경제도 규모 확대와 함께 성장속도는 줄어드는 것이다.
2012년 정부와 한국은행이 예상한 성장률 전망치는 3.7%. 물론 유럽재정위기 영향이 크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유럽사태가 진정되더라도 "앞으로 5년간 경제성장률은 3% 중후반, 그 후 10년 간은 3%대 초반에 머물 것"이라며 "5% 이상, 심지어 7%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국경제도 바야흐로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일보가 신년을 맞아 주요 민간 경제연구소 거시분석책임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다수가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중장기적으로 5%대 성장은 어렵다"고 대답했다. 변양규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실장은 "2001~2008년 평균 성장률이 4.4%인 점을 감안하면 중장기적으로 5% 이상의 성장은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우리나라의 중장기 성장률을 ▦2010~2015년은 연 3.8% ▦2016~2026년은 연 2.4%로 예상했다.
고성장 잔치는 끝났다
저성장국면의 진입은 '선진국 장기불황+국내 잠재성장률 저하'가 맞물린 결과.
우선 선진국경기의 침체요인이다. 2008년엔 미국발 금융위기, 이번엔 유럽발 재정위기. 과거의 글로벌 불황은 대체로 전쟁 오일쇼크 같은 경제외적 요소에 의해 발생한 반면, 최근엔 한결같이 선진국 내부의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다.
현 선진국 위기는 곧 '부채의 위기'다. 금융위기는 민간부채 때문에, 재정위기는 정부부채 때문에 발생했다. 따라서 미국발 금융위기든 유럽발 재정위기든, 빚으로 커온 선진국 경제시스템이 이제 한계에 봉착했으며 이를 치유하려면 어마어마한 시간과 어마어마한 구조조정의 고통이 수반될 것임을 의미한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주요 선진국들이 겪는 재정위기는 속성상 단기간에 치유되기 힘들다. 그렇다고 민간부문의 자생적 회복력도 충분하지 못하고 정부의 경기부양여력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많이 소진된 상태이기 때문에 상당기간 세계 경제의 부진이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결국 미국 유럽은 장기간 부진 혹은 침체에 빠질 공산이 크고, 그런 만큼 해외의존도 높은 우리나라의 성장여력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내부요인도 저성장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4%전후까지 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권순우 실장은 "저출산ㆍ고령화로 인해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설비투자도 계속 위축되고 생산성개선도 어려움을 겪고 있어 중장기 잠재성장률이 약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장률이 갑자기 3~4%로 갑자기 떨어진 게 아니라, 그 정도 밖에는 클 수 없는 신체가 이미 되었다는 얘기다.
저성장을 현실로
이명박정부의 출범구호였던 '747'(7%성장-4만달러 국민소득-세계7대 경제대국)는 애초부터 비현실적이란 지적을 받았다. 정부는 뒤늦게 "꼭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목표와 도전의식을 갖자는 뜻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오히려 국민들에게 고성장에 대한 비현실적 환상만 불러 일으켰다.
한 경제전문가는 "정치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경제적 관점에선 지금은 고성장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보다 저성장시대를 솔직하게 현실로 받아들이고 정부도 기업도 개인도 그에 맞도록 사고와 행동을 바꾸도록 하?게 더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747같은 수많은 공약들이 나올 텐데 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장밋빛 미래의 환상을 제시하는 게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해야 할 일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그리스나 이탈리아처럼 되지 않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 둘째, 인플레 없는 경제를 위해 어떤 경우든 물가는 안정시키는 것. 셋째 이미 '망국적' 수준으로 악화된 양극화 및 그 원인으로 소득불균형을 해소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산율을 높이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지원해 잠재성장률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는 것.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저성장에 물가까지 높으면 국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지므로 정부가 중장기 물가안정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고, 한상완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연구본부장은 "무엇보다 소득 재분배 정책을 통해 불균형을 개선해야 한다. 그래야 내수가 성장을 뒷받침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일본, '잃어버린 10년'이 '잃어버린 20년'으로
1990년대 중반만해도 일본은 고성장국가였다. 세계에서 제품을 가장 잘 만드는 나라, 무역흑자를 가장 많이 내는 나라, 그래서 국민들도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미국과 유럽이 자존심을 꺾고 일본배우기에 급급했던 게 불과 15년, 20년전 얘기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대표적인 저성장국가다. 그냥 저성장이 아니라 마이너스 성장도 예사다.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잃어버린 20년'으로 가고 있다. 고성장에서 저성장으로 '연착륙'하는 데 실패한 전형적 나라가 된 것이다. 모든 게 일본을 닮은 우리나라로선 저성장시대의 길목에서 일본의 실패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로 드와이트 퍼킨스 미 하버드대 교수는 "세계경제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이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일본이 저성장의 늪에 빠지게 된 건 '버블' 때문이었다. 고성장 시대를 거치며 잔뜩 끼었던 자산(주로 부동산)의 거품이 1990년대 순식간에 꺼지면서, 은행들은 부실화됐고 경제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문제는 그 대응이었다. 우선 ▦뼈를 깎는 구조조정하는 게 정답이었지만 일본 정부는 손쉬운 경기부양을 택했고 ▦재정지출확대 위주의 경기부양은 그렇지 않아도 나쁜 정부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부양책의 약효를 반감시켰으며 ▦여기에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된 고령화로 인해 성장잠재력은 더욱 떨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장기침체국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은 2000년대 들어서도 계속돼 '잃어버린 20년'으로 연장됐으며, 지금 추세라면 '잃어버린 30년'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실제로 최근 10년(2002~2011년)간 일본의 성장률은 연평균 0.4%에 그치고 있으며 호황의 정점이었던 1991년 전 세계 GDP의 10%를 차지했던 일본경제의 글로벌 위상은 지금 5.8%로 반토막이 났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지위도 중국에게 넘겨줬다.
그러다 보니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일본기업들의 경쟁력도 후퇴만 거듭하고 있다. 소니는 삼성전자에 자리를 내줬고, 도요타 역시 1위 자리에서 쫓겨났다. 전경련 관계자는 "엔고와 높은 법인세, 과도한 인건비, 엄격한 규제, 개방기피로 인한 자유무역협정(FTA)지연, 여기에 대지진 이후 전력수급불안까지 겹쳐 기업들의 일본 탈출러시가 이뤄지고 있다"면서 "이는 일본 내의 고용악화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옛 영광회복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호성 박사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여전히 일 할 수 있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기업들의 혁신경영이 약화되다 보니 수출경쟁력도 크게 떨어졌다"고 지적했고 같은 연구소의 구본관 박사는 "지진과 원전사고 등 지정학적 리스크 때문에 일본 기업들이 최근 해외투자를 많이 택하면서 잠재 성장률은 그만큼 계속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정호성 박사는 "(우리나라가)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출산율을 높여 노동인력을 계속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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