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40분. 원용희(59) 기아차 반장은 어김없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 집을 나섰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올해 마지막 근무일이지만 그에게는 34년 직장 생활을 마감하는 날이어서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차로 1시간 반 남짓 달려 도착한 경기 평택항 기아 자동차 전용 부두. 그는 직장 생활의 대부분을 하루 평균 3,000대 가량의 신차가 '기아(KIA)'마크를 달고 약 100개 나라로 떠나는 부두에서 보냈다. 현장에서 '감독님'으로 통하는 그는 항구에 도착한 차가 작은 흠이라도 있는 지 꼼꼼히 살펴보고 배에 안전하게 싣는 과정을 관리 감독한다.
1977년 기아차의 광명 소하리공장에 입사한 원 반장이 수출 현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7년이다. 기아차가 미국 포드사의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프라이드(미국명 페스티바)'를 수출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원 반장은 "말이 수출이지 거의 전쟁이었다"며 "자동차 전용 항구가 아니어서 온갖 물건과 섞이다 보니 차량을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특히 한 겨울 거센 해풍에 수백 대 차량이 각종 곡물 가루를 하얗게 뒤집어쓰면 세차하느라 손이 부르텄고, 항구가 붐벼 제 시간에 배가 들어오지 못하면 차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가져오느라 밤을 지새야 했다. 급기야 포드사에서 "수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생산을 맡기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결국 기아차는 문제 해결을 위해 인천항 대신 2000년 평택항을 수출항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기아차 이전을 반대한 인천 항만항운노조에서 연간 물동량 보장을 요구하며 태업을 벌였다. 항구에서 수출용 자동차를 배에 싣는 작업은 항운노조가 맡기 때문에 이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수출을 할 수 없다. 원 반장은 "항운노조 간부를 만나 사정도 하고 설득도 했지만 실패했다"며 "결국 다른 배를 수소문해 4일 동안 인천항에 있던 차 6,000대를 군산과 목포로 옮겼다"고 회고했다.
2003년에는 평택 항운노조가 들고 일어났다. 기아차의 수출 물량이 증가하면서 일자리가 늘어나자 신규 인력을 채용했는데 여기 불만을 품은 기존 조합원들이 조업을 거부했다. 그바람에 한 달 넘게 자동차 수출이 차질을 빚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항구에서만 25년 세월을 보낸 원 반장은 지난달 정부가 선정한 '무역 1조 달러 달성'특별 유공자 31명에 뽑혔다. 그는 "차가 무사히 배에 실리도록 도우미 역할만 했을 뿐"이라며 "좋은 차를 만든 직원들 덕에 큰 상을 받았다"고 고마워 했다.
기아차 수출 역사를 모두 지켜본 원 반장은 갈수록 디자인과 품질이 향상되는 새 차를 볼 때마다 반갑고 놀랍다. 그는 "2001년 현대차와 한솥밥을 먹게 됐을 때 기아차 식구들이 잘 정착할 지 걱정이 많았다"며 "디자인과 품질이 발전해 세계에서 몇 손 가락 안에 드는 회사로 성장한 것을 보니 너무 기쁘다"고 소회를 밝혔다.
원 감독은 새해에 또다른 삶을 꿈꾸고 있다. 그는 "차를 가득 실은 배를 떠나 보낼 때마다 가슴이 찌릿지릿했던 뿌듯함을 계속 느끼고 싶다"며 "그래서 수출 현장을 떠날 수 없어 자동차 수출 관련 회사와 할 수 있는 일을 얘기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해에도 더 많은 차들이 한국 자동차 산업과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전 세계에서 신나게 달리길 바란다"며 "또 다른 역할로 여기 보탬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평택=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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