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없어 의료 포기… 청년 절반이 백수… "잿빛 새해 더 두렵다"
그리스에서 시작한 재정위기의 여파로 유럽이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다. 삶의 질이 훼손되고 금융시스템이 왜곡됐으며 민주주의마저 위협받고 있다. 그래서 유럽은 지금 어느 해 보다 구름이 많이 낀, 우울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2012년 새해라고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끝 모를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어둠이 절정으로 치닫는 임진년 벽두를 맞아, 나라 살림의 위기가 유럽인 생활 전반에 미친 영향을 짚어보고 2012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망하는 시리즈를 5회에 걸쳐 게재한다.
11월 그리스 아테네와 테살로니키에서 공영병원이 임산부 분만을 거절한 사례가 잇달아 발생했다. 자연분만 비용 950유로(144만원)를 먼저 내지 않으면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우울한 소식에 단련된 그리스인들이지만, 병원이 신생아 목숨을 담보로 선금을 요구한다는 소식에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병원의 비정함과 정부의 무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뉴스 댓글과 소셜미디어를 폭풍처럼 뒤흔들었다.
사태가 확대되자 정부가 개입해 임산부 예외조항을 만들었지만, 이것만으로 이미 붕괴된 그리스 의료제도의 거대한 구멍이 메워지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통의 그리스
유럽의 복지 신화가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특히 재정이 바닥난 남유럽의 국민은, 빚더미에 올라 앉은 정부가 지출을 대폭 줄이면서 기본권마저 포기해야 할 지경이다.
재정위기 진원지인 그리스의 의료 상황이 특히 심각하다. 제약사는 약값을 내지 못한 병원에 약품 공급을 끊고, 병원 외래창구에서는 진료비 5유로(7,500원)을 내지 못해 발을 구르는 환자가 적지 않다. 당뇨병 환자가 인슐린 처방을 받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건강보험 혜택 축소로 의료비 부담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최근 맹장수술 비용이 983유로(149만원)로 6.6배 급등했고, 제왕절개 비용은 1,543유로(234만원)로 5배 올랐다. 치료를 포기하는 저소득층이 늘자, 주로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던 세계의사회(MDM)는 그리스로 보내는 자원봉사 의료 인력을 대폭 늘렸다. 불안감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2011년 상반기 그리스의 자살률은 전년에 비해 네 배나 증가했다.
고난의 스페인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또 다른 요인은 실업이다. 실업이 가장 심각한 스페인은 공식 실업률이 22.8%, 청년 실업률은 49%에 달한다. 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국민 4분의 1인 1,000만명이 월소득 500유로(76만원) 미만의 빈곤상태에 있고 이 중 300만명은 300유로(45만원) 미만의 극빈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장성한 자식이 부모에게 얹혀 사는 경우도 허다해졌다. 마드리드 외곽에 사는 주부 마르 모레노(51)는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뭔가를 남겨주려 하지만 우리는 물려줄 게 없다"며 24세, 21세 자녀의 독립을 지원할 수 없는 경제적 상황을 원망했다.
더 큰 문제는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지금처럼 정부 지출이 축소되면 경제성장률이 하락할 것이고 낮은 성장률이 지속되면 일자리 창출이 제한될 수밖에 없어 고실업 현상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불안한 북유럽
과거 유럽연합(EU)을 열렬히 지지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지금 반EU 정서가 지배적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프랑크 프리첸(55)은 "우리가 왜 남유럽을 도와야 하느냐"며 "돈을 대 줘도 그 나라는 파산할 것"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실제 2009년 네덜란드 국민의 80%가 단일통화에 찬성했지만 최근 조사에서는 반대가 더 많았다. 이런 여론을 등에 업고 우파 자유당은 강령을 '외국인 추방'에서 '유로존 탈퇴'로 바꿔 중도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 있다.
유로화를 쓰지 않는 북유럽 국가도 수출 부진에 따른 경기 침체를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스웨덴은 2012년에 유로존 국가의 수요감소 탓에 성장률이 1.3%에 머무를 것으로 예측된다. 덴마크도 2011년 3분기 성장률이 0.8%에 머물렀는데, 전문가들은 이미 덴마크가 경기후퇴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 "기댈 언덕 연금마저…" 긴축 조치에 직격탄
남유럽 정부가 잇달아 재정지출을 줄이는 긴축조치에 착수하면서 이들 나라가 유지했던 관대한 연금제도도 종언을 고하고 있다. 40세에 은퇴해도 연금을 받던 그리스 같은 나라에서 경제력에 걸맞지 않은 과도한 연금은 재정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돼 왔다.
이탈리아 정부가 최근 마련한 330억 유로 규모의 3차 긴축재정안에는 다양한 연금혜택 축소방안이 담겨 있다. ▦은퇴 전 마지막 봉급을 기준으로 하던 연금지급 기준을 기여도(실제 납입 보험료) 기준으로 바꾸고 ▦월 1,400유로 이상 연금을 받으면 물가가 올라도 연금액을 올리지 않으며 ▦여성 은퇴연령을 60세에서 62세, 남성 은퇴연령을 65세에서 66세로 상향하는 것이 골자다.
그리스도 연금 수급 연령을 대폭 상향조정했다. 일례로 이미용 직군은 15년 근로기간만 충족하면 60세부터 월 800유로의 연금을 받았지만, 이제는 65세가 넘거나 40년 이상 일해야만 연금을 받을 수 있다.
60대 고령층의 60~70%가 현업에서 일하는 북유럽인의 눈으로 보자면 알프스 이남의 황금연금은 '빈자의 사치'에 불과하겠지만,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남유럽 사람들에게 마지막 보루였던 연금의 축소는 또다른 재앙일 수밖에 없다.
아테네의 미용사 카테리나 일리아(44)는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30년 가까이 일을 했는데 염색약 때문에 생긴 각종 질환으로 의사들이 일을 그만두라 충고한다"며 "연금 기준을 강화한 것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그리스에서는 65세까지 일하는 사람이 노동인구의 10%에 불과할 정도로 노령층 일자리가 부족해, 연금 개혁에 따라 은퇴 시점과 연금지급 시점 사이에 장기간 수입 공백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 月135만원 포르투갈 엔지니어, 앙골라선 몸값 4배… '유럽 엑서더스'
요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서는 일자리를 찾아 나선 유럽 청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001년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던 아르헨티나는 요즘 매년 8% 이상의 고속성장을 이어가고 있고 이민 자격을 제한하지 않아 취업이민이 쉽다.
런던에서 증권거래인으로 일하다 2년 전 영어 교사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착한 제레미 핸슨(28)도 그런 경우다. 그는 “구조조정 당시 런던의 회사는 전화를 얼마나 빨리 받는가로 직원을 평가했다”며 “그러나 이곳은 직장 구하기가 훨씬 쉽다”며 조국을 등진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실업률에 짓눌린 유럽 청년들이 이민을 선택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이 같은 엑서더스는 재정위기가 극심한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에서 특히 심하다. 13%의 실업률과 마이너스 성장을 견지지 못한 포르투갈의 젊은이는 과거의 식민지 브라질, 앙골라로 떠난다. 포르투갈에서 900유로(135만원)의 월급을 받던 엔지니어가 앙골라에서는 4배나 더 받을 수 있다.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출신은 말이 통하는 나라라도 있지만, 경제난이 심각하면서도 외국에서 모국어를 쓰지 못하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이민도 언감생심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올해 5만명이 호주나 미국으로 직업을 찾아 나섰지만 모국을 떠난 그리스인은 2,500여명에 그쳤다. 용케 호주로 이민한 그리스인 조이 드로시스는 “그리스에 계속 있었으면 끝장이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로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나가다 보니 엔지니어, 은행원 등 고급인력의 유출이 심각하다. 이들이 예금을 빼 새로운 나라로 나가면서 생기는 국부유출도 무시할 수준을 넘는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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