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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별세/ 투옥·고문·수배로 점철된 삶… '민주화의 양심'으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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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별세/ 투옥·고문·수배로 점철된 삶… '민주화의 양심'으로 남다

입력
2011.12.3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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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졌다.

30일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삶은 민주화운동 그 자체였다. 체포 26회, 구류 7회, 5년6개월에 걸친 두 차례의 투옥과 수많은 가택연금, 장기 도피생활, 로버트케네디 인권상 수상,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에서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 등의 이력이 재야 운동권의 대부로 통하는 그의 지난 세월을 말해준다.

고인은 1947년 경기 부천의 교사 집안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고를 나와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1967년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제적돼 강제 징집을 당했다. 복학 이후 3선 개헌 반대투쟁(1969년), 교련 반대데모와 서울대 내란음모사건(1971년) 등으로 기나긴 수배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후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저항한 서울대 5•22사건과 명동성당 장례식 사건의 배후로 지명 수배돼 1979년 10•26 때까지 기술학원 강사로 피신생활을 했다.

그는 1983년 첫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두 차례 의장을 맡았다. 1985년 9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전 경감 등에게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기도 했다.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폭로해 국내외에 파장을 일으켰고, 후에 당시 일을 담은 '남영동 5층15호실'이란 책을 펴냈다. 고문 후유증으로 한기와 콧물 때문에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할 만큼 고통을 겪었다. 2007년부터 앓아 온 파킨슨병도 고문 후유증이란 분석이다.

부인 인재근씨는 평생동지였다. 인씨는 구속자가족 모임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결성을 주도하고, 김 고문과 함께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 고문이 오랜 재야생활을 접고 제도권 야당에 들어간 건 1995년의 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재야 대표로 부총재를 맡았다. 이 무렵인 1995년 10월 에드워드 케네디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6년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돼 내리 3선을 했다. 노무현정부 출범 후인 2004년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경험을 쌓았다. 이후 정동영 전 의장과 여권의 차기 주자로 양대 축을 형성했지만 여권 주자들의 동반 지지율 정체에 시달리다 2007년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원칙과 가치를 추구하던 정치인이었다. 2002년 3월 불법정치자금 고백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돌연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이 있던 2000년 8월 당시 권노갑 의원에게서 불법선거자금 2,000만원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정치권은 '순진한 바보'라고 했지만 국민들은 신선하다고 받아들였다. 2004년 6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동산 분양원가 공개 반대 입장에 대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 그가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패하자 '민주화운동세력의 정치적 패퇴'란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기치로 활동을 벌였지만 총선•대선 승리의 병풍역할을 하겠다는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박석원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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