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새해는 임진년, 용의 해다. 십간(十干) 중 검은색에 해당하는 임(壬)과 십이지(十二支) 중 용을 가리키는 진(辰)이 합쳤으니 '흑룡의 해'다. 용의 해는 십간과 십이지의 조합에 따라 갑진, 병진, 무진, 경진, 임진의 순서로 육십갑자를 돈다.
알다시피 용은 상상의 동물이면서 좋은 것은 죄다 모은 길상의 상징이다. 용꿈은 태몽 중 으뜸이요, 돼지꿈과 더불어 최고의 길몽으로 꼽힌다.
중국 황하의 용문협곡 거센 물살을 뛰어 오른 물고기가 용이 된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등용문'은 입신 출세의 문을 가리킨다. 전통시대 한국인이 이승을 하직할 때 타고 가는 상여는 앞뒤로 용머리 판을 달아 저승길을 호위한다.
'안 본 용은 그려도 본 뱀은 못 그린다'고, 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용은 도처에 있다. 싸구려 백자 항아리에 단골로 등장하는 용 그림부터 조폭의 넓은 등짝에서 꿈틀대며 남들 겁 주는 용 문신까지 많기도 참 많다.
용의 생김새를 볼작시면, 중국 문헌 에 이렇게 나온다. "머리는 낙타 같고 뿔은 사슴 같고 눈은 토끼 같고 귀는 소와 같고 목은 뱀과 같고 비늘은 잉어 같고 발톱은 매 같고 발 바닥은 범과 같다." 위엄에 걸맞게 두루 갖췄는데 유독 코만 못 생긴 돼지코라, 용이 돼지를 싫어한다고 한다. 용띠와 돼지띠의 결혼을 꺼리는 속설이 거기서 비롯됐다.
용은 물에 살면서 변화무쌍 자유자재로 조화를 부린다고 한다. 중국 문헌 에 따르면, 번데기처럼 작게 오므라들었다가 천지를 덮을 만큼 부풀기도 하고, 구름 위로 솟구쳤다가 깊은 샘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그 신통한 능력으로 물을 다스리고 구름과 바람을 일으키고 천둥 번개를 부려 비를 내린다. 하여 가뭄이 극심할 때면 용을 일으키는 기우제를 올려 비를 부르고, 어촌 주민들은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을 모시는 큰 굿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빈다. 24절기 중 유월 유두 풍속으로 논두렁에서 용신제를 지내고 용떡을 해 먹는 것이나 두레에 농악대가 나설 때 용 깃발을 앞세우는 것도 용이 비를 관장하는 물의 신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다 옛일이고 옛풍습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친숙한 용은 우리 조상들이 알던 용이 아니라 입에서 불을 뿜는 흉측한 괴물이다. 컴퓨터게임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이 용은 용을 악의 화신으로 보는 서양 문화에서 나왔다. 용감한 기사가 용을 물리치고 예쁜 공주를 얻는 동화나 기독교 수호 성인이 용을 죽인 이야기의 뿌리가 그것이다.
시절이 상전벽해로 달라졌건만, 60년 만에 다시 돌아온 흑룡의 해를 맞아 결혼, 출산, 장례 등 관련 업계는 벌써부터 흑룡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흑룡을 특별히 더 상서롭게 여길 근거는 없다. 한국 문화의 동물 관련 민속 전문가인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십이지 동물을 색깔과 연결해 길흉을 점친 예는 거의 없다"며 "흑룡 마케팅은 상술일 뿐"이라고 말한다. 흑룡이 보면 어리둥절할 이런 소동은, 지금 같은 첨단 과학 시대에도 용이 한국인의 마음에 그만큼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겠다.
상술에 휘둘려 덩달아 수선을 피우기보다는 용이 선사하는 덕담으로 새해를 여는 것이 낫겠다. 올해는 다들 용꿈 꾸시고, 개천에서 용 나고 미꾸라지가 용 되는 경사를 맞으시길. 사회 양극화가 심해져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미꾸라지가 용 되는 희망조차 버리면 이 아니 가련한가.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이 솟구치는 용처럼 힘차게, 일마다 풀리고 뜻대로 이루는 한 해가 되시길.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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