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다시 시작한 문화기획 '100℃ 인터뷰'에서 만난 화제의 인물들은 대부분 솔직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번 인터뷰는 '100℃'란 문패에 걸맞게 펄펄 끓었다. 소설가 공지영씨다. 사실 그는 '100℃ 인터뷰' 원년의 첫 초대손님이었기에, 따지고 보면 이번이 두 번째 출연이다. 2007년 1월 1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날 것의 언어로 뜨겁게 토해냈던 그는 이번에도 변함없었다. 올해 영화 '도가니' 열풍으로 원작 소설이 올해만 50만부 가까이 팔리며 여전히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를 유지하고 있지만, 예전과 달리 화제는 단연 트위터와 정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도 "요즘은 쉬는 시간엔 트위터를 주로 한다"고 말하고, 최전선의 사회운동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정치적 발언에도 앞장 서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꼼수다' 열풍에도 적극 동참해 직접 콘서트에 출연하는가 하면 얼마 전 나꼼수팀의 미국 공연에도 따라 나섰다. 급기야 종합편성(종편)채널에 출연한 연예인들을 비난한 글로 종편 대주주들인 보수언론으로부터 뭇매도 맞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할 말을 다 한다. "지난 10년 동안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는 그가 1980년대 운동권 투사처럼 머리띠를 두르다시피 한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20일 오후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공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올해 참 일이 많았죠. '도가니' 때문에 주목 받다가 연말에는 트위터 글로 시끄러웠죠.
"상반기, 하반기 너무 다른 삶을 살았네요. 올 여름 유럽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그날 밤에 '도가니' 첫 시사회가 있었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못 쉬었어요."
-요즘 트위터를 통해 쏟아놓는 정치적 발언이 아슬아슬합니다. 폭주한다는 느낌까지 주는데.
"요새 진짜 저 내놨어요. 왜냐면, 이 정권 하에서 정말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때는 군사정권이고 우리 자체도 힘이 없었고, 또 그러려니 하는 것도 있었잖아요. 근데 민주화 10년을 거친 지금에 이런 행태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요. 제가 사랑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추리소설이나 복수소설이라도 쓸까 싶어요."
-마치 80년대처럼 운동을 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80년대에는 과격했었죠. 아니, 근데 너무 당연한 말을 하는 거 아니에요? 2010년대에 시민들이 아닌 걸 아니라고 왜 말 못해요? 전 더군다나 작가인데. 제 의견을 왜 표명 못해요?"
-보수언론으로부터 공격도 많이 받았는데.
"저 원래 찍혔어요. 조선일보랑은 원래 그러니까 별로 신경 안 써요. 97년에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이란 술자리에서 대판 싸웠어요. 그 이후로는 제 기사가 거의 안 나오더라고요. 그 때 그 사람을 처음 봤는데 저를 완전 바보로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이면 차장이지 지금 뭔 짓이냐'고 그러면서 싸우고 자리를 나왔는데 출판계 인사들이 아무도 안 말리더라고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나중에 그래요. 어느 작가가 조선일보랑 싸우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작가 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인간적 자존심을 건드리는데 왜 가만히 있어야 되냐고 따졌어요. 하느님이 저한테 이런 성질 주셔서 요즘은 감사해요.(웃음)"
-인순이와 김연아의 종편 출연을 비난한 트위터 글로 시끄러웠는데, 어떻게 쓰게 된 건가요.
"그게 작정하고 쓴 게 아니라 대화하면서 나온 말이거든요. 한 후배가 '누나, 인순이가 종편까지 나오네?'라고 해서 '아, 개념 없는 거지 뭐. 뭘 신경 써' 그렇게 가볍게 얘기한 거죠. 김연아의 경우 '연아야 내가 너를 예뻐 했는데 너도 이제 성년이니까 네 의견을 표명하는 게 맞겠지. 그런데 아줌마랑은 이제 안녕'이라고 했는데, 이런 의견 표명이 왜 나쁜 거죠? 이해할 수 없어요. 이게 전부예요. 근데 악플러들이 벌떼같이 달려들길래 '욕 나오기 전에 당신들은 꺼져라'고 했는데 그걸 교묘하게 섞어서 김연아 꺼지고 인순이 꺼지라는 식으로 욕설을 한 것처럼 언론들이 써 놨어요. 제가 그 트윗을 지웠다고 했는데, 그거 안 지웠거든요. 얼마 전에 미장원에 갔다가 여성조선을 주길래 봤는데, 공지영 인터뷰가 있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어디 행사장에서 한 말을 가지고 문답문답 형태로 바꿔 마치 인터뷰한 것처럼 써놓은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사실을 왜곡하고, 그 왜곡된 사실을 근거로 또 비판하고. 이걸 일일이 대응할 수도 없고. 70년대 동아일보 사태 등 별의 별 것을 다 보고 자랐지만 솔직히 요즘처럼 언론에 절망적인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유명인들은 괜히 트집 잡힐까 봐 논란이 될 만한 말을 삼가고 자기검열도 하는데.
"그걸 노린 것 같아요. 주변에서 트윗을 한 달 동안 하지 마라, 그래요. 너무 공격 당하고 테러까지 당할 수준이니까. 근데 생각해보면 그게 저 사람들이 원하는 거잖아요. 내가 트윗을 닫고 자기검열 하는 걸. 하지만, 우린 절대로 원하는 대로 안 해주죠.(웃음) 누구를 괴롭히거나 특별히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내 의견을 말하는 건데. (저에 대한) 비난은 괜찮아요. 비판당할 수 있죠.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어요. 근데 말하지 말라는 거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종편 출연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있는 건가요.
"미디어법이 날치기 통과된 것부터 기분이 안 좋았고, 저 사람들이 신문으로 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방송까지 하면 어떡할까, 세상이 얼마나 끔찍할까, 그런 생각을 해요."
-하지만 본인도 예전에 그 신문들에 연재나 기고를 하지 않았나요.
"트위터에 '그 땐 노무현 때였잖아요'라고 올렸다가 논란이 됐는데, 이건 설명이 필요해요. 사실 <봉순이 언니> 는 동아일보에 연재를 했고, <즐거운 나의 집> 은 중앙일보에 연재를 했죠. 근데 당시 저는 한번도 민주주의가 후퇴할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이런 곳에도 진출해서 바꿔나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그런 꿈이 MB정권 때문에 다 무너진 거죠. 민주주의가 이렇게 후퇴할 줄이야. 제가 정말 반성했던 게, 지난 10년 동안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제 소설 보면 알겠지만 제가 엄청 명랑하고 밝아지고 있었어요. 민주주의가 됐으니까 정치에 별 관심 두지 않고 적당히 냉소하기도 했죠. DJ와 노무현 정부 때는 인권위원회에 가끔 관여하는 정도였는데, 인권위가 참 잘한다 생각했고 이게 계속될 줄 알았죠. 근데 지금은 뭐예요. 인권위 망했어요. 민주주의라는 게 선거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어요. 어렸을 때는 솔직히 명분 때문에 운동했던 게 강했는데, 지금은 이게 어떻게 만든 나라인데,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인데 훼손당하나 싶어 너무 분해요. 80년대를 거친 사람들이 다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잖아요. 그렇게 힘들게 이룩한 건데 한 순간에 뒤집어 놓고…. 이제는 80년대식 명분이 아니라 우리 삶을 훼손시킨 것에 대해 너무 화가 나는 거죠. 우리 아이들 세대를 위해서라도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즐거운> 봉순이>
-언제부터 그렇게 현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됐나요.
"(2008년 촛불시위 당시 경찰이 시위대가 청와대로 향하는 걸 막기 위해 컨테이너로 쌓은) '명박산성' 처음 봤을 때. 끔찍했어요. 이 사람이 소통을 완전 거부하는구나. 용산참사 때는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죠. 느닷없이 낯선 사람에게 따귀를 맞는 느낌이었어요. 생각할 겨를도 없고, 리액션을 취할 새도 없이 계속 따귀를 맞는 기분 있잖아요. 한 3년 반 동안 그랬어요. 그 때'나는 꼼수다' 들으며 이거다! 했죠. 지금 정신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 뭔가 해야 돼, 하던 차에 희망 같은 걸 찾은 거죠. 그리고 21세기에는 운동을 자학하는 방식으로는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단식도 하지 말고, 추운 데서 떠는 삼보일배도 하지 말고…. 삼겹살 구이 투쟁으로 연기를 막 내서 괴롭히는, 그런 식으로 즐겁게 하자고. 나꼼수를 들었을 때 그 유쾌함에 바로 이거야 싶었죠."
-트위터 활동을 하며 정치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건가요.
"이명박 정부 때문에 속이 엄청 상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던 때에 트위터를 만난 거죠."
-트위터에서 굉장히 세세한 것까지 다 답글을 달아주던데.
"답글을 다는 기준이 몇 가지 있어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그거는 꼭 답을 해줘요. 전에 자살한 스포츠 아나운서 분이 있었잖아요. 그 분이 죽기 전에 저한테 '저 죽고 싶어요'라는 멘션을 달았어요. 그 땐 그런 게 되게 많이 왔어요. 전 그 분이 누군지도 몰랐고 그냥 관심 받으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묵살했어요. 근데 다음 날인가 죽었다는 거예요. 제가 살릴 수 있었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목숨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은 꼭 답을 해줘요. 두 번째는 강아지 잃어버린 거, 그거 너무 애처로운 거 알거든요. 나머지는 우리가 좀 알았으면 좋은 것을 리트윗 해요."
-하루에 트위터를 얼마나 하나요.
"서울시장 선거 때부터는 쉬는 시간엔 주로 트위터를 보는 것 같아요. 미국 가서도 (트위터하느라 인터넷 접속료로) 얼마나 돈이 나갔는지.(웃음)"
-트위터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뭔가요.
"제가 사실 사람들하고 소통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독자 대상으로 활동을 안 하니까 출판사에서 트위터를 하래요. 싫다고 했더니 스마트폰을 사준다고.(웃음) 고민하다 막상 뚜껑을 여니까 너무 재밌는 거예요. 사람을 안 만나도 되면서 소통은 가능하니까. 트위터를 시작하고 두 달쯤 지난 여름이었는데, 시골집에서 맥주 사진을 올리고 '여긴 너무 추워요'라고 했더니, 갑자기 '같이 맥주 먹고 싶어요'라는 글이 막 올라왔어요. 그래서 농담으로 '몇 시 몇 분 몇 초에 우리 다 같이 건배하자'고 했는데, 놀랍게도 '여기 은평구요''여기 필리핀이에요' '여기 뉴욕이에요' 이러면서 100명 정도가 전 세계에서 동시에 건배를 하는 거예요. 굉장히 놀랐어요. 이게 트위터의 세계구나. 작가로서 사람들의 삶을 계속 관찰할 필요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의 속내를 읽을 수 있고 필요하면 만날 수 있다는 게 큰 이득이죠. 제 세계가 엄청 넓어지는 거고. 근데 오늘 완전 트위터 인터뷰네.(웃음)"
-작가로서는 독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하지 않나요.
"작가의 신비감은 옛날 말이에요. 요즘은 신비감 있는 작가는 잊혀져요. 저는 저 자신이 노출되는 거 별로 두렵지 않아요."
- 노출이 심하면 손해를 볼 수 있지 않나요.
"저는 알면 알수록 매력 있는 사람이라서.(웃음) 트위터는 만나지 않고서도 저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좋아요."
-대신 적도 늘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트위터 하기 전부터 저를 싫어한 사람들이에요."
-발랄하고 쾌활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좋지만, 너무 가볍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옛날부터 저한테 그랬어요. 또 제가 표현하고 싶은 걸 표현했는데 싫어서 떠나는 사람을 어떻게 하겠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그것 때문에 제 표현을 줄이고 싶진 않아요. 제가 언제 팔로워 많이 모으려고 트위터 했나요. 작가는 자기 맘대로 하는 거예요. 학자나 정치인은 자제해야 하지만. 저도 정치하려면 자제해야겠죠."
-트위터 활동이 작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있나요.
"작가 인생은 아니고, 제 인생에선 그런 거 같아요. 이번 서울시장 선거 때 박원순 시장을 지지한 것이 제 정치 성향을 공개적으로 처음 드러낸 거예요. 제 인생에선 굉장히 큰 일이었어요. 80년대에도 한번도 그러지 않았거든요. (당시 운동권의 대세였던) 김대중 비판적 지지에도 서명하지 않았고."
-정치적 발언을 많이 하니까 보수언론은 '폴리테이너'라고도 부르는데.
"폴리테이너, 좋은 말 아니에요? 정치를 즐겁게 하면 좋잖아요."
-폴리페서가 학문 안 하고 정치권을 기웃거린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듯이, 폴리테이너도 그런 낙인을 찍는 용어죠.
"그 사람들이 낙인 찍는다고 해서 제가 찍히나요. 제가 23년째 소설을 쓰면서 실질적으로는 판매부수가 1,000만부 넘었거든요. 제 독자들은 그런 거에 안 넘어 갈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단연코 제 책 한 권도 안 읽었을 거예요."
-내년은 정말 정치의 해인데.
"내년에도 적극 표현할 거예요. 시민으로서 적극적으로. 이상 문학상 소감 때도 얘기했는데, 작가로서, 세 아이의 엄마로서, 시민으로서, 여성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할 거예요."
-정치에 너무 개입하면 정파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건 골치 아파서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이번에 민주당 당대표 선거하는데 어떤 분이 멘토가 돼 달라고 연락이 왔길래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자꾸 정치 얘기를 물어보는데, 시민들이 정치에 대해 얘기하면 안 되는 건가요? 해야죠. 좋은 나라일수록 하는 거 아니에요? 작가가 정치에 개입한다는데 '개입'이란 용어부터 거부감이 들어요. 이건 언론의 자유, 알권리를 짓밟는 정권에 대한 상식적 차원의 분노에서 나온 거에요."
-직접 정치할 생각은 없나요.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거 너무 싫어요. 사람 만나는 거 싫어해서 백화점 북적이는 시간에 안 가는 사람인데 어떻게 악수하고 다니겠어요."
-비례대표 하면 악수 안 해도 되는데.
"아우~ 싫어요. 내가 왜 공무원을 해요. 정치하면 하고 싶은 대로 못하잖아. 말 자제해야 하고. 작가는 트위터에 술 먹는 얘기를 올려도 되지만 정치인이 그러면 골치 아프죠. 난 논리적이지도 않고, 조직도 너무 싫어해요."
-내년 대선에선 누굴 지지할지 밝힐 건가요.
"하겠죠? 하지 않겠어요?"
-가톨릭 신자이지만, 같은 신앙인으로서 대통령이 기도회에서 무릎 꿇는 거 보면 어떤가요.
"이건 말하면 안 되는데.(웃음) 서로 다른 신을 믿는 거 같아요. 같은 신일 수 없어요."
-다음 작품은 준비하고 있나요.
"못한다니까요. 사랑 얘기인데 제목도 정해놨고 내용도 있는데 감정이 안 돼서 못 쓰겠어요. 그래서 분노의 소설을 쓸까 생각 중이에요.(웃음) 지금 기획해 놓은 소설이 열 개 정도 돼요. 공상과학 소설도 있고, 시간이나 우주에 관한 것도 쓰고 싶고. 너무너?쓰고 싶어요. 그런데 현실이 계속 이러면 쓸 수가 없어요."
3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끝낸 뒤 공씨는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향했다. 그를 만난 20일은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기 이틀 전으로, 오후 9시부터 대한문 앞에서 정 전 의원을 응원하기 위해 열린 '정봉주가 달린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뷰 때도 정 전 의원에 대한 판결 결과를 걱정하던 그는 22일 징역 1년형이 확정되자 트위터에 "가카와 BBK 사이에 엄청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구속하십시오"라는 글을 띄우며 항의를 표시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채지은기자 cje@hk.co.kr
강지원 인턴기자(서울여대 언론홍보4)
박영채 인턴기자(고려대 한국사학4)
■ 뒤늦은 문학상 수상 "아무 느낌 없어""
공지영씨는 올해 단편 '맨발로 글목을 돌다'로 제3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1988년 등단한 그는 <고등어> <봉순이 언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즐거운 나의 집> 등 발표 작품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지만, 문학상과는 큰 인연이 없었다. 이상문학상 수상은 어찌 보면 그의 작품에 대한 문단의 뒤늦은 인정인 셈이다. 소설가 김훈씨 외엔 친한 문단 동료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의 반, 타의 반 한국문단과 떨어져있던 그에게 문단에 대한 불만이나 서운함이 없지 않았을 터. 그는 그러나 뒤늦은 수상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말했다. "이상문학상 수상소감에도 썼어요. '참 이상하다. 그렇게 바랐을 때는 절대 오지 않더니 아무렇지도 않은데 오니까 이상하다'고." 즐거운> 우리들의> 봉순이> 고등어>
문단으로부터 '대중성에 영합한다'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등 적잖은 비판을 받기도 했던 그는 "처음부터 혼자의 길을 걸었는데, 지금 보면 문단과 떨어져 살아온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요즘의 한국문학이 대중과 더욱 멀어져 힘을 잃고 있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전문가끼리 모여서 계속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올라가면 나중에 정말 문학을 위한 문학으로 바뀌잖아요. 좋게 말하면 동종교배가 계속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근친상간으로 기형이 태어나는 거죠."
그간의 비판에 대해서도 그는 자신감으로 받아 넘겼다. "중학생 때부터 가져온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한번도 흔들린 적 없었어요. 중학생 때 쓴 습작 노트에 이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단문으로 쓸 것, 짧게 쓸 것, 속도감 있게 묘사할 것.' 기특하게도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더라고요. 대중성에 영합한다고 하는데, 제가 무슨 수로 영합을 하겠어요. 할리우드 영화 기획자들이 수억을 들여 대중 기호가 뭔지 분석해도 승률이 50%가 안 되는데…. 그런 능력이 있으면 할리우드 진출했죠.(웃음)"
그는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작품활동을 했다면 지쳐 쓰려졌을 것"이라며 "우연히 제 행보에 맞게 시대가 변해준 게 정말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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