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장까지 급우를 왕따 시키니… 담임은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
#"친구들끼리 문제니까, 내가 개입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끼리 해결하는 게 맞다." 22일 스스로 생을 등진 대전 A여고 B(16)양 유족의 주장에 따르면, B양은 자살 직전 교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힘겹게 집단따돌림 문제를 털어놓았지만, 교사는 아무 힘이 되지 못했다. 유족은 B양이 자살하던 날 수업 중에도 같은 반 아이들과 말다툼을 벌였지만 교사가 그대로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고 덧붙였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담임교사 C씨는 올해 3월 한 건의 학교폭력사건 신고를 접수하고 수개월간 몸살을 앓았다. 자신의 반 반장이 '노는 아이들'과 어울려 1년 내내 같은 반 D군을 종 부리듯 괴롭혔다는 것. 간식 심부름을 시킨 것은 물론 본인이 볼일을 보는 동안에 휴지를 들고 화장실 문 앞에 서있게 하며 망신을 줬다는 내용이었다. 가해자는 아니라며 항의하고, 반 아이들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상태에서 교사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한 청소년 상담기관에 도움을 요청한 C씨는 "내가 무기력하게만 느껴진다. '왜 교사가 빨리빨리 일을 해결 못하냐. 당장 가해자를 전학 보내라'는 피해학부모의 원망과 학생들에 대한 죄책감에 무척 난감하다"며 괴로워했다.
교사는 학교에서 피해학생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첫번째 구원자다. 학생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지도자로서 갈등의 해소자 역할을 하고 교실 내 권력관계를 일찍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교사는 드물다. 조정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회장은 "딱 한발 물러서 있다는 표현이 적격이다"고 말했다.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은 단지 책임감이 없어서가 아니다. 학교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교사들이 많다. 조정실 회장은 "학교에 특강을 가 학부모들이 직접 겪은 피해사례와 결과, 대처법, 느낀 점 등을 소개하고 나면 항상 교사들로부터 발표자료 좀 보내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며 "왕따 징후가 보일 때, 가해자 학부모가 항의할 때 등 각각의 상황 대처법에 교사들이 목말라 있는데도, 교육당국이 이러한 정보와 매뉴얼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20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구 중학생이 보인 멍 자국, 용돈 요구 등은 대표적인 학교폭력 징후였는데도, 누구도 심각성을 알아채지 못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폭력 피해징후는 ▦아프다고 결석, 양호실행을 자주 요구 ▦이유 없이 전학의사 표명 ▦상처나 멍이 있는데 얼버무림 ▦새 물건을 자주 분실 ▦죽고싶다는 낙서 발견 ▦잦은 용돈 요구(훔치는 것 포함) ▦풀이 죽어있음 ▦입맛이 없다고 함 ▦친구에게 전화 올 때 짓는 난처한 표정 ▦갑작스런 성적 하락 등이다.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피해학생들이 보이는 징후 등을 교사들이 구체적으로 숙지하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며 교사 대상 '지킴이 훈련(Gate Keeper Training)'을 제안했다. 아이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보호자(교사)가 폭력 징후, 대응 매뉴얼, 방관학생 다루기, 전문기관연계 등을 의무적으로 실습해야 한다는 것. 하 원장은 "교사 혼자 직접 해결하기 어려우면 외면할 게 아니라 전문기관에 의뢰하도록 하는 등, 학교 구성원 모두가 폭력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신철균 한국교육개발원 부연구위원은 "수업 잘하는 교사를 우대하고 생활지도를 잘하는 교사에게는 어떤 보상도 없는 학교문화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울 마포구 한 고교의 상담교사는 "교사가 '정의회복' 주도자가 돼야 하는데도 실제로는 일에 치여 아예 물러나 있거나, 거꾸로 독단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학교폭력자치委는 '쉬쉬委'
학교폭력 사태가 불거지면 대부분의 학교는 우왕좌왕하기 일쑤다. '위기대책반'역할을 하는 학교폭력자치위원회는 제 기능을 못하고, 위기사태를 관리할 전문가도 따로 없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자치위원회는 폭력이 발생했을 때 분쟁을 조정하고 처벌수위를 정하는 학내기구로 2004년부터 모든 학교에 설치됐다. 문제가 발생하면 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가 꾸려지고 자치위 개최 횟수는 초중등 교육정보공시 서비스인 '학교알리미(www.schoolinfo.go.kr)'에 공개된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자치위 개최 횟수가 많은 학교는 폭력사건이 많은 학교로 비친다"며 개최 자제를 꺼린다. 임정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은 "지역 교육청이 자치위를 연 횟수가 많은 학교에 축소 지시를 내리고, 교장들은 혹시라도 학교평가에 불이익을 받을까 봐 쉬쉬하며 합의를 종용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학교폭력책임교사를 맡았던 경기지역 한 고교 교사는 "자치위가 많이 열리면 아이들도 학교를 믿고 더 많은 사건을 제보해온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역 사회에선 '문제 많은 학교'로 낙인 찍히고 오히려 한 건도 자치위를 열지 않은 학교는 문제가 많은데도 '평화로운 학교'로 광고된다"고 꼬집었다. 지난해 청소년 폭력예방재단 조사에서 학교 폭력 가해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학생이 41%나 됐고, 학교처벌(4.1%)이나 경찰조사(1.5%)를 받은 경우는 100명 중 5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학교가 사건을 은폐하거나 사후처리를 회피하면 학생들에게 "보호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조정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회장은 "학교가 폭력사안을 흐지부지 해결할수록 아이들은 '아무도 나를 보호해 줄 수 없다'며 점점 남을 공격하는 자세를 보인다"며 "오히려 자치위를 제대로 열지 않은 학교를 징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마다 전문 위기관리자를 두고 자치위원장 역할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의 경우 지역사회 교육당국 책임자인 교육장이 각 학교에 직속기관 성격의 '위기코디네이터'를 두고 긴밀히 협조한다. 코디네이터는 평소 학교의 의사소통 구조 등을 파악하고,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교육장에게 즉시 보고하며, 교내외 자원을 동원해 사태해결을 주도한다. 명확한 책임자가 존재하고, 사태를 덮는 게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해 의사소통을 하니 학부모와 교사가 등돌릴 일도 일도 없다.
전구훈 한국학교사회복지사협회 회장은 "학교폭력 및 자살사태게 불거졌을 때 보여주기 식으로 교장 직위 해제를 하고 보는 태도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교내에 상주하는 위기관리자를 채용하고 다른 교사들도 예방, 복지, 상담, 치료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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