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의 출석원서명부가 발굴됐다. 반병률(55)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러시아에서 이 자료의 사본을 입수해 27일 공개했다.
국민대표회의는 만주와 러시아, 미주 등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모임으로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74회에 걸쳐 열렸다. 독립을 위해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각계 대표 인사들이 참여한 회의란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그동안 신문기사, 일본관헌 자료 등 2차 자료만 남아 있어 참여 인사들의 구체적인 면면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대표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작성된 문서가 공개된 것은 11월 독립기념관이 '국민대표회의 선언서' 원본 자료를 공개한 이후 두 번째다.
반 교수가 발굴한 자료는 11회부터 74회까지 국민대표회의 출석원서명부다.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문서관에 소장된 자료로 94쪽(가로 20cm, 세로 31cm)에 달한다. 반 교수는 "8월 말 학술대회 참석차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한인 역사학자인 송잔나 박사의 도움으로 이 문건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출석원서명부는 대표자 125명이 자신의 이름을 해당 날짜에 서명하는 방식으로 기록돼있다. 3월 8일 열린 제36차 회의부터는 각 대표들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해 대표들이 자기 고유번호 아래에 이름을 서명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주목할 점은 출석명부 날짜를 단기 연호인 '四二五六年'으로 표기해 국민대표회의 내에서 창조파의 입장이 반영됐다는 사실이다. 반 교수는 "국민대표회의 정식회의가 개최되기 이전의 임시회의에서 창조파가 참석대표들의 심사와 회의규정 작성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국민대표회의 내에서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개편, 보완해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이 맞서 난항을 겪었다. 결국 창조파가 실권을 잡고, 개조파가 회의를 전면 거부함으로써 결렬됐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 가운데 6월 7일 열린 마지막 회의 출석원서명부에는 창조파 46명만 이름이 올라 있어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자료는 31일 발행되는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0집)에 소개된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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