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 보뱅
인생의 저녁 무렵에, 마티스는 가위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그는 순수한 포도주 빛깔의 폭풍우와 푸른 실크 빛깔의 봄을 하늘에 대고 직접 잘라낸다. 그는 색연필의 간단한 마술로 그것들을 이어 놓는다. 날이 갈수록, 마치 어린아이가 잠들기 전에 자기의 기쁨을 하나하나 헤아리듯이. 그는 고요한 시간들을 거두어들인다. 그는 늙어서 몸이 아프다. 그가 하나의 별을 거두어들인 것은 고통을 겪고 있을 때였다. 그는 노년의 아치 아래에서 유년기를 꽃피웠다. 밤이 그를 만나려고 앞으로 나아왔다. 밤은 소녀의 부드러움과 샘물의 신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린다. 그는 웃듯이, 또는 죽듯이 그림을 그린다.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다닐 수 없는 길로 간다. 그는 가장 커다란 고통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만드는 이 기쁨을 축하하기 위하여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아니다) 하나의 노래의 두 화음을 훔쳐낸다. 장미와 라일락 만세. 그 사람, 화가는 가버린다. 그는 마치 사과 도둑에게 열려 있듯이 계절에게 열려 있는 정원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빛의 대팻밥들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하지만 마티스라는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름다움의 이름들은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니니까. 아름다움의 이름은 신경의 나선(螺旋), 피의 심연, 세계의 어떤 상태의 이름이다. 거리에서 바람에 도르르 말리는 종이, 과일의 투명함, 낡은 계단의 곰팡이도 위대한 화가들에 의하여 하늘에서 소환된 번개만큼이나 우리들에게 영혼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가르쳐 준다. 화가들은 공통의 아름다움과 결혼하여, 그것을 섬기고, 칭송하는 것뿐이다. 그들이 아름다움에게 이름을 주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아주 잊지는 말았으면 하는 헛된 희망을 품고 공주님의 결혼식날 밤, 공주님에게 우리의 이름을 전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살아간다는 고통스러움 위에 수천 송이의 장미와 라일락꽃들을 던지는 것과도 같다.
● 색종이 오리기는 아이들의 전유물. 마티스는 노년에 아이처럼 작업했어요. 심하게 앓아 두 번이나 수술을 받은 후 색종이들을 오려 붙이며 병실을 어지럽혔어요. 그림 그리러 밖에 나갈 기운이 없었으니까요. 주위에서 걱정스런 얼굴로 수군거렸을 겁니다. 쇠약해진 늙은이가 애처럼 장난질이구나. 그렇지만 아랑곳하지 않고서 완성한 작품들은 아름다운 걸작으로 손꼽히죠. 보뱅은 말하네요. "스무 살에,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춤춘다. 서른 살에, 우리는 원 안을 떠돈다. 쉰 살에, 우리는 안쪽으로든 바깥쪽으로든 쳐다보지 않고 원 주위를 걸어다닌다. 이후에는 중요하지도 않다. 아이들과 노인들의 특권. 우리는 투명인간이다."(다가올 여인 La Femme à venir) 다가올 날들에는 노인처럼 지혜롭게, 아이처럼 천진하게 그리고 투명인간처럼 대담하게 살아보기로 해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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