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괴롭힘 끝에 지난 20일 투신자살한 대구 중학생 A(13)군 사건은 우리사회 뿌리깊은 학교폭력의 실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 피해자, 죄의식을 모르는 가해자, 방관하는 목격자들, 속수무책인 학교와 교육당국이 비극을 키웠다. 사회 전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때다. 약육강식의 정글과도 같은 교내 폭력과 괴롭힘 앞에서 학생들은 왜 무기력한지, 폭력이 폭력을 낳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교사와 학교와 가정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3회에 걸쳐 전문가들의 진단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 본다.
#"어디서 몇 대를 맞았는지, 우리 애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전교생이 다 알지만, 교사나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장님 신세가 되는 게 학교폭력이더라고요."
서울 동작구 N초등학교 학부모 L씨는 지난해 말 아들 P(12)군이 같은 학교 남학생들로부터 집단폭행과 성추행을 당한 일을 뒤늦게 알고 경악했다. L씨를 더욱 충격에 빠뜨린 것은 자신이 반년 넘게 몰랐던 사실을 전교생이 다 알고 있었다는 것. L씨는 "어쩜 그렇게 한 명도 신고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울먹였다.
#학교폭력 상담 베테랑인 김승혜 청소년폭력예방재단 클리닉센터 팀장이 자주 듣는 교사들의 하소연이 있다. "우리 반에 '왕따'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신고하라고 해도 애들이 말을 안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김 팀장은 "고자질하면 같이 당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퍼져있는 또래집단이 침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이들의 입을 하루아침에 강제로 열게 할 방법은 없다. 근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잔인한 방법으로 심화하고 반복되는 학교폭력, 이를 누구보다 먼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같은 학교 학생들이다. 가해학생 연령대가 어리면 어릴수록 자신이 남을 때리고 괴롭힌 사실을 영웅담처럼 소문 내기 쉽다는 속성 때문이다. 피해학생도 부모나 교사보다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주위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만다. 문제를 가장 먼저 알게되는 학생들이 방관함으로써 자살과 같은 더 큰 피해로 이어지는 것이다.
도우면 같이 당한다
초등ㆍ중학교 시절 3년간 학교폭력과 집단따돌림에 시달려왔다는 서울 노원구 K고 1학년 K(18)군은 "교사에게 말한 사실이 들통나면 더 많은 애들에게 '찌질하다'는 낙인이 찍힌다"며 "이게 두려워서 나도, 같은 반 애들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휴대폰, 메신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교사나 부모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이버 공간에서 괴롭힘이 이루어지는 사례일수록 이 같은 경향은 심하다.
그러나 학교는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김승혜 팀장은 "보통 학교에서는 학생부 교사에게 신고하라고 하거나, 나무로 된 신고함을 하나 걸어두고 '열심히 신고하라'고 말하는 게 대책의 전부"라고 말했다. 신철균 한국교육개발원 부연구위원은 "학업성취도를 이처럼 중시하는 환경에서 교사들도 생활지도보다 수업에만 몰입할 수밖에 없고, 이런 교사에게 학생들이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거나 신뢰를 갖고 도움을 요청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외면=가해' 인식교육 절실
전문가들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외면이 가해의 한 종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정실 전국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회장은 "아이들은 직접 말해서 가르쳐주지 않으면 '나만 아니면 된다', '나는 관계 없어'라고 생각하기 쉽다"며 "외면과 방관이 학교폭력이나 괴롭힘을 유발하는 교실 안 권력을 지탱하는 일종의 가해행위라는 점을 명확하게 말과 글과 영상 등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교실에서 방관자의 부정적 면모를 표현한 그림이나 사진을 보여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방관학생 교육'을 한다. 전 회장은 "이런 교육 없이는 학생들이 폭력 장면을 보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재미있어 하면서 제2, 제3의 가해자가 속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움 찾기 훈련' 의무화해야
이러한 방관학생 교육에서는 단순히 신고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 '훈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대부분 청소년들이 신고센터 전화번호를 알아도 '상담사가 불친절할 것 같다',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다'는 단순한 이유로 전화를 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대안으로 하 원장은 학교에서 도움찾기훈련(Help Seeking Program)을 의무화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학기초에 상담기관 리스트를 배포하고 직접 방문해 상담사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익명성은 어떻게 보장되는지 보고 듣고 경험하게 하?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직접 몸으로 겪어 봐야 '신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김승혜 팀장도 "학교의 완전한 무기명 소통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훈련, 홍보를 해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방관학생들이 눈을 감지 않고 입을 열도록 하는 노력이 '그물망식 학교폭력 감지 체계' 구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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