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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풍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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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풍경1

입력
2011.12.2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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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꽃이 노오랗게 핀 황토밭을 바라보면 아름답다. 김병연이란 왕조 시대의 시인은 이곳 무등산 기슭에서 삿갓을 베고 눈 속에 묻혀 죽었다. 그것은 관념이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본 일이 없는데 우리들은 그 자리에 삿갓을 씌운 돌비를 세웠다. 그날 밤 젊은 수배 학생 하나가 이 황토밭을 쫓기다가 죽었다. 까맣게 부패한 얼굴 튀어오른 눈알은 컬러 사진이 되어 터미널과 지하철역에 깔리고 그날 밤 한 청원경찰은 저수지에서 가물치가 튀는 소리를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정확히 첨벙 하는 그 소리를. 그러나 사람들은 곧 잊을 것이다. 배추꽃이 지면 메꽃이 피고 메꽃이 지면 들국이 피고 들국이 지면 눈꽃이 피리라. 그리하여 몇 년 후쯤 한 수배 학생이 쫓긴 저수지가에 그의 시신을 덮은 거적 밖으로 드러난 진흙 구두의 모양을 본뜬 이 세상 허망한 돌비 하나 세워지리라.

● 광고와 유행이 기록하지 않는 것. 교과서에도 기록되지 않는 것. 역사도 쉽게 잊는 것. 그런 걸 기억하는 사람이 시인입니다. 첫 축제에 맘 설???대학 1학년 시절. 학교에 가보니 국가보안법으로 수배당했다 익사체로 발견된 조선대 청년 이철규군의 사진이 길 위에 깔려있었습니다. 그의 사진 위로 향기로운 흰 라일락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그 꽃잎을 밟고 그의 얼굴들 사이로 교정을 걸어 다녔어요. 올해가 며칠 안 남았네요. 눈꽃이 내리고 세상이 하얗게 덮이고 마음 속에서 또 많은 일들이 사라지겠지요. 우리 마음 속 시인은 이 한 해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누구의 얼굴로, 무슨 일들로 허망한 돌비 하나를 어느 먼 날의 노오란 황토밭과 메꽃과 눈꽃들 사이에 세울까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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