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야, 추운 데서 잘 지내니?"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오전 경기 의왕시 안양시립 청계공원묘지. 전날 밤 내린 눈이 조용히 쌓여 있는 이곳에서 2007년 안양 초등생 혜진ㆍ예슬양 살해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인 이혜진(당시 10세)양 추모제가 열렸다.
혜진양 가족에게 크리스마스 이브는 악몽이다. 혜진양은 4년 전 이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오겠다"고 동네 동생 우예슬(당시 8세)양과 함께 집을 나선 뒤 정성현(43)에게 납치ㆍ살해돼 77일 만에 주검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4년은 그 악몽을 떨치기엔 턱도 없는 시간이다. 가족들은 여전히 각자의 방식으로 사투 중이었다. 어머니 이달순(44)씨는 "평소 혜진이 얘기는 입에 올리지 않던 혜진이 언니도 동생 생일이라고 달력에 표시해놨더라"며 "서로 혜진이 얘기는 안 하지만 얘기하면 더 보고 싶어서 그럴 뿐 가족들은 아무도 혜진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 이창근(50)씨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남들 보기 안 좋아서"라고 얼버무렸다. 이씨는 당시 실종된 딸을 찾아다니느라 다니던 인쇄소도 그만 뒀고, 지금은 동네를 돌며 종이박스를 수집하고 있다. 딸이 보고 싶을 때마다 습관처럼 마시던 술도 이제는 떨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정신 없이 막 돌아다니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던 이씨는 이내 "혜진이가 없는 지금은 불행하다. 사는 의미가 없다"고 속마음을 토로했다.
사건 때문에 살림도 곤궁해졌다. 혜진이를 찾겠다고 전단지 뿌리고 이를 도울 사람을 고용하느라 든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또 다른 피해자 예슬양의 가족들은 "기억하기도 싫다"며 아예 동네를 떠나 소식도 끊었다. 하지만 혜진이네는 60㎡ 남짓한 안양 집을 계속 지키고 산다. "부모가 못나고 아이를 관리 못해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어머니는 "우리가 떠나면 혜진이도 떠나야 된다. 막내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여기를 어떻게 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혜진이네를 도와온 전국미아ㆍ실종가족찾기시민의모임 나주봉 회장은 "2005년 실종 아동 관련 법이 만들어지면서 아이를 찾지 못한 가족에게는 약간의 치료비가 지원되긴 했지만 혜진이네처럼 사건이 종결된 경우에는 아무런 지원도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사건 직후 아동 대상 성폭력 범죄자 처벌을 강화하는 '혜진ㆍ예슬법'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남은 가족을 다독이는 배려는 부족했다. 나 회장은 "이런 큰 일을 겪으면 경제적 고통에 가족간 대화마저 끊겨 고통이 커지는데 법을 보완해서라도 고통 받는 가족을 치유하는 제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안양=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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