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사업체가 부도 위기에 몰린 조모(54)씨는 낮엔 일하고 밤엔 살림에다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고된 일상을 4년여 이어왔다. 그 덕분에 남편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조씨는 우울증을 얻고 말았다.
축 처져 있는 조씨를 보다 못한 딸이 엄마를 병원에 데려갔다. 딸은 매일 아침과 저녁 식사를 함께 준비하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고 병원 상담에도 늘 동행했다. 아빠와 동생에게도 엄마의 증상을 알려 적극적으로 돕도록 설득했다. 덕분에 조씨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증상이 훨씬 나아졌다.
조씨가 빠르게 회복된 데는 딸의 역할이 컸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겐 가족이나 친구의 사소한 말 한 마디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회복을 위해선 의료진만큼이나 주변 가까운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왜?"라고 묻지 말기
가족이나 친구가 우울하다고 하소연하면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왜 우울하냐"고 묻는다. 하지만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왜'라는 말은 가능한 한 쓰지 말라고 정신과 전문의들은 말한다. 이유를 들어주면서 같이 이야기하려는 좋은 의도라 해도 왜라는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느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황태연 대한우울ㆍ조울병학회 홍보이사(용인정신병원 지역정신보건부장)는 "왜 그러냐는 말을 들으면 환자 입장에선 우울한 것이 모두 자신 때문인 것 같고 상대방이 자신을 책망하거나 비난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며 "의사는 물론 주변 사람들도 우울증 환자에겐 얼마나 힘드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 하는 게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아주 민감한 상태인 우울증 환자에겐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질문은 가급적 피하라는 소리다.
또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환자가 이야기했을 때 놀라거나 충격을 받은 듯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환자 입장에선 남들이 자신을 너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좌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자신을 탓하고 비난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여행ㆍ운동 강요하지 말기
우울증 환자에게 기운 내라며 여행이나 운동을 해보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환자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활동에 속한다. 우울증은 온몸에 영향을 미쳐 근력도 약해지고 매사에 의욕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심하면 실제로 통증 같은 신체 증상도 함께 호소한다. 대한우울ㆍ조울병학회가 지난달 전국 성인남녀 6,4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중증 이상의 우울 증상을 느끼는 사람 중 65.7%가 신체 증상을 동시에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태에선 건강한 사람처럼 운동이나 여행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되레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억지로 뭔가를 새롭게 하도록 다그치기보다는 평소에 하는 일상적인 활동들을 곁에서 함께 해주는 게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시간을 정해 규칙적으로 식사를 같이 하고 나서 가볍게 산책을 나가주면 환자가 일시적으로라도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한우울ㆍ조울병학회 박원명 이사장(여의도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은 "환자와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모임을 주선하고 거기서 환자가 좋아하는 주제를 이끌어내 자신감을 키워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며 "환자가 이런 제안을 거절한다면 지나치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시간을 두고 꾸준히 설득해보라"고 조언했다.
감정 묵살하지 않기
우울증 환자는 스스로 감정이나 행동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진다. 환자가 감정을 표현하도록 조심스럽게 유도하되, 그 감정에 대해 묵살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말고 일단 이해하고 수용해주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환자가 "너무 우울해 죽고 싶다"고 호소하면 대개는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하며 말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럴 땐 옳고 그름을 딱 잘라 판단하기보다 먼저 충분히 주의 깊게 들어주고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는 환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황 이사는 "우울증은 주변의 도움을 받으면 회복이 훨씬 빠를 수 있기 때문에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우울증은 뇌가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이 제대로 분비되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다. 방치하면 점점 심해져 뇌의 인지 기능까지 손상될 수 있다. 환자가 가능한 한 빨리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 역시 주변인의 역할이다. 미국 국립정신보건연구소(NIMH)는 우울증 환자와 가까운 사람이 치료나 상담 과정에 동행해주고, 두 달 넘게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다면 의사와 함께 다른 치료법을 찾아보기를 권하고 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우울증 나타나는 신호
우울증 환자들은 눈에 보이는 병변이 나타나진 않지만 알게 모르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평소 기분이 자주 가라앉거나 예민한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말이나 행동을 보이면 혹시 우울증을 겪고 있지는 않은지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심리적 증상
-성관계를 포함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활동에 대해 흥미를 잃는다.
-죄책감이나 무력감을 호소하거나 자신이 가치 없다고 이야기한다.
-주의집중력이나 기억력이 떨어지고 뭔가를 결정하기 어려워한다.
-죽음이나 자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자꾸 비관적인 방향으로 생각한다.
-과도하게 화를 내거나 쉽게 적대감을 표현한다.
● 신체적 증상
-잠을 잘 못 자거나 반대로 너무 많이 잔다.
-식욕이나 몸무게가 지나치게 줄거나 는다.
-쉽게 피로해지고 의욕을 잃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근육통이나 두통, 손발 저림을 호소한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망상이나 환각을 경험한다.
● 특징적 행동
-계속 인상을 쓴 상태로 지낸다.
-고개를 숙이고 상대방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말수가 줄고 목소리가 작아진다.
-행동이 전체적으로 느려진다.
-누워있으려고만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기 꺼려한다.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을 자꾸 남에게 주려 한다.
-사후세계를 동경하는 말을 자주 한다.
자료: 대한우울∙조울병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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