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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개방이 핵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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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개방이 핵보다 강하다

입력
2011.12.2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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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와인에 관한 해박한 지식에 놀랐습니다. 공식 만찬에 나온 와인들은 최고급 프랑스 브루고뉴산(産)이었는데 김 위원장은 다양한 와인의 향기와 맛에 능통했습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고 노무현 대통령을 수행한 경제 관료가 들려준 일화다.

국민들이 굶주리는 최빈국 독재자의 어처구니 없는 호사라고 분노할 일이지만, 와인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와인들의 미묘한 차이를 감별하는 능력은 오랜 시간의 지속적인 관심과 예민한 감각이 있어야 갖춰진다는 점을 알 것이다. 더구나 와인은 서구 취향의 최고 단계 아닌가. 김 위원장 사망 소식에 그 일화가 겹치면서 '서구 문물에 조예가 깊던 그가 가장 남기고 싶었던 업적은 어쩌면 핵무기가 아니라 개혁, 개방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실제 그의 집권 17년을 되짚어 보면 여러 차례 개혁ㆍ개방을 시도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한 달여 만에 제네바 합의를 통해 1차 북핵 위기를 해소했다. 이후 '3년상(喪)'을 선포하고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직후인 98년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지방과 기업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개인 소유 대상물을 늘리는 조치를 취했다. 마침 한국에는 남북 평화공존을 천명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 클린턴 정부도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을 모색하며 그의 개혁ㆍ개방에 운신의 폭을 넓혀줬다. 이런 대내외적 노력이 결합해 99년 북한은 10여년 만에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서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집권 후 첫 방중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의 개방 노선이 옳았다"고 밝혔고, 남북정상회담, 미국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평양 방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 방북으로 이어지는 2000~2002년은 그의 전성기라 할만 했다. 2002년 7월에는 성과급제 등 좀더 과감한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한 7ㆍ1 경제 개선 조치를 발표하고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등 개방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2002년 초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악의 축'발언 이후 제2 연평해전 도발 등 갈팡질팡하던 북한 개혁ㆍ개방 노선은 2003년 이라크전과 동시에 사라진다. 반미 동맹 사담 후세인의 몰락을 보며 김 위원장은 '이라크가 핵무기를 가졌다면 미국이 쉽게 전쟁을 개시했을까'라는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이후 핵무기 개발에 매달리면서 북한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경제는 악화일로에 빠졌다.

김정일의 후계자가 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아버지의 집권기를 숙고한다면 북한 체제의 유일한 활로는 핵무기가 아니라 개혁ㆍ개방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가 어릴 때 스위스에서 살며 시장경제를 체험했다는 점은 일말의 희망을 갖게 한다.

물론 이런 희망은 '안드로포프 재즈'신드롬일 수 있다. 1982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구 소련 서기장 사망 후 KGB 출신 유리 안드로포프가 후계자로 등장하자 일각에서 "그가 서구음악 재즈를 좋아하니까 냉전 해소에 나설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은 것에서 유래한말이다.

하지만 북한이 향후 개혁ㆍ개방을 추진하고 성공하는 것이야 말로 북한은 물론 남한에게도 최선의 길이라는 점에서 차기 북한 정권에 거는 기대는 절실하다.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에 따르면 독일처럼 급속하게 통일이 이뤄질 경우 북한과 남한의 경제 수준이 비슷해 질 때까지 드는 비용은 2조1,400억 달러에 달하지만, 향후 3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루면 그 비용은 3,220억 달러로 줄어든다. 북한의 개혁ㆍ개방이 우리에게도 절실한 이유다.

정영오 경제부 차장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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