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 사흘이 지났다. 주가 폭락과 환율 상승 등 금융시장의 불안은 딱 하루, 그것도 유럽 재정 불안이 겹쳐 나타나고는 이내 진정됐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의 경험에 비춘 '조문 논란'우려도 정부가 재빨리 방향을 잡으면서 금세 시들해졌다. 한국사회의 충격 흡수력이 놀랍다. 이렇게 일찍 차분해져도 되는가 싶을 정도다.
이 모두 3대 세습이라는 '리얼리티 쇼'가 매끄럽게 진행된 덕분에 가능한 안정이고 평화다. 아울러 김정일이 지난해 9월 아직 앳된 그를 당 중앙위 국방부위원장으로 앉히고 본격적으로 권력 세습을 서둘러 온 결과라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그의 '공(功)'이다. 스스로 졸사(猝死)를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선견지명이다. 금융시장의 조기 안정으로 확인된 속 편함만으로도 한국사회는 그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생각할수록 무서운 북한
현재 한국사회의 심리적 안정이 얼마나 고마운지는 문제의 '리얼리티 쇼'가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졌을 경우를 생각하면 누구나 수긍할 만하다. 개중에서도 안보 위협처럼 직접적인 게 없다. 부지불식간에 많은 국민의 뇌리에 파고든 '서울 불바다론'은 얼마나 끔찍한가.
남북한의 경제력과 현대전의 관건인 무기체계의 차이 등에 근거한, 잠깐 동안의 불바다를 감내할 용기야말로 궁극의 안보 대책이라는 외침도 있기는 했다. 북측의 군사적 모험이 치르게 될 필연적 대가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남측의 희생과 단순 비교하면 가능한 시각이다. 그러나 보험금 심사도 그렇듯, 손실 평가는 늘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살을 주고 뼈를 벤다'는 각오는 무협지 주인공에게나 통할 이치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이 아니라 피부가 살짝 벗겨지는 고통조차도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적잖다. 농사 일이나 육체 노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낫에 베거나 망치에 손가락을 찧어도 '빨간 약'이나 바르고 넘어갈 수 있지만 '서울 사람'은 다르다.
더욱이 불바다는 생명과 신체에 대한 근본 위험만 환기하는 게 아니다. 운이 좋아 그런 위험을 피한 사람도 정밀기계처럼 짜여 돌아가는 경제ㆍ산업 활동의 차질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3월 대지진으로 경제 톱니바퀴의 톱니 하나가 부러진 일본이 올해 2차 석유위기 직후인 1980년 이래 31년 만에 처음으로 무역적자를 기록한다. 이로써 일본경제의 회생 전망이 더욱 흐려졌으니, 자연재해 수준의 참화가 대외의존도가 한결 심각한 한국경제에 몰고 올 피해는 불을 보는 듯하다. 그뿐이 아니다. 북한의 권력 불안이 조금만 극단적 양상을 띠어 탈북 난민이 대량 발생할 경우의 혼란 또한 안보위협 요인이다.
북한의 위협은 '예측 가능성'의 한계 때문에 더욱 커진다. 이번 김정일 사망을 통해 거듭 확인됐듯, 북한은 스스로 알리지 않는 한 밖에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기 어렵다. 우주의 기원을 대폭발(Big Bang)에 두어도 그 이전과 팽창하는 우주의 바깥 쪽은 '인식의 지평' 너머에 있고, 인간 존재의 죽음 이후를 종교적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다. 북한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 또한 체계적 인식보다는 신념이나 상상력의 영역에 속한 듯하다.
운명·현실 헤칠 지혜를
역대 정부의 대북 인식에서 두려움의 내용과 크기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지 몰라도 그 근거가 두려움이라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피폭 같은 특이상황에서도 꾸준히 이어진, 북녘 동포를 향한 인도적 관심조차 절반쯤은 그래 보인다. 인간 본성인 연민이 역사와 언어를 공유해 온 동포에 대해 더욱 특별할 수야 있지만, 그들의 삶의 조건이 더 이상 악화할 경우를 고려한 전략적 선택에 좌우되지 않았다고 자신하기 힘들다. 북한이 우리의 잠재의식에 위협으로 파고든 지가 그만큼 오래다.
연민과 두려움 사이의 이 좁은 공간을 헤쳐나가야 한다. 속이 터질 지경이라도 그게 이 땅의 운명이자 현실이다. 좁은 틈새를 헤집는 고도의 기술과 지혜 획득 가능성이나마 위안으로 삼는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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