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에서 ‘검은 머리의 차이코프스키’로 불리는 한인 작곡가 정추(88)씨가 17일 한국을 찾았다. 21일 저녁 모교인 서울 양정고가 주최한 양정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날 음악회가 열린 양천구 양천문화회관 대강당에선 정씨의 가곡 ‘진달래 꽃’과 ‘내 조국’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그는 “카자흐스탄에선 자주 불렸어도 고국에선 처음이야. 곡이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아 감격스러워”라고 했다.
그는 비운의 천재 음악가로 분류된다.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국립 음악원 졸업 작품인 ‘조국’이 만점을 받아 수석 졸업했고, 재학 중엔 차이코프스키의 ‘4대 제자’로 발탁됐다. 1961년 가가린의 우주 비행 성공을 기념해 소련이 성대하게 개최한 축하 공연에서 연주된 ‘뗏목의 노래’가 그가 만든 곡이다. 카자흐스탄 음악 교과서에 60여곡, 피아노 교과서엔 20여곡이 수록될 만큼 카자흐스탄에선 ‘국민 음악가’로 통한다.
정작 한국에선 그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수(米壽)의 나이 내내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정착했지만 과거 23년은 남한 국민으로, 13년은 북한 인민으로, 17년은 무국적자로, 16년은 소련 공민으로 살았다. 반세기 가까이 고국 밖에서 유랑자처럼 정처 없이 떠돌았으나, 유별난 애국심 하나는 변하지 않았다.
정씨는 “광주고등보통학교(현재 광주제일고) 3학년 때 퇴학당했는데, 그게 역사와 사회를 의식하게 된 시발점이었지”라고 회고했다. 학교에서 우리말을 썼다는 이유로 15번의 정학을 당하며 눈 밖에 나 있던 차에 학교에 상주하던 일본 장교에게 존칭을 안 붙인 게 퇴학을 불러왔다.
“그땐 학교에서 조선어를 쓰면 양동이 2개에 물을 가득 담아서 양손에 들고 교실 뒤에 하루 종일 서 있었지. 집에 돌아가서는 일본어로 반성문을 써 왔어야 했어.”
퇴학 1년 뒤 상경해 양정고에 들어갔고 여기서 학업을 마쳤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음대를 졸업하고 해방 이후엔 영화감독인 형(정준채)을 따라 월북했다. 46년부터는 북한에서 평양음대 교수로 지내며 영화제작소에서 영화 음악을 만드는 음악 과장을 역임하는 등 북한 음악계에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평탄한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57년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 유학할 때 김일성의 우상화, 독재체제를 반대하며 시위를 주도한 게 화근이었다. 쫓기는 신세에서도 “1인 독재체제는 어느 체제 안에서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은 꺾이지 않았다. 북한 당국의 체포 명령을 피해 소련으로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그는 곧이어 소련 당국으로부터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당했다.
“1인 독재가 존재하는 한 통일은 이뤄질 수 없어. 김정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 여러 생각이 들었지. 중동에서도 자스민 혁명을 시작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잖아. 조국도 통일이 멀지 않은 것 같아. 최근 박갑동 선생으로부터 넘겨받은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의장직 활동을 더 활발히 할 생각이야.”
남은 꿈은 통일 운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훗날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내 조국’이 통일된 조국의 애국가로 불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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