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과 관련해 19일(현지시간) 내놓은 성명을 어떻게 봐야 할까.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에 대해'라는 제목을 외교적 격식을 갖춘 조의 표명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때 미국의 태도와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확연하다. 성명의 주체와 격이 17년 전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94년 7월 직접 조의 성명을 발표한 뒤 로버트 갈루치 북핵 협상대표를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의 분향소로 보내 조문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번 성명에서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으로 발표 주체를 한 단계 내리고 분향소 조문도 하지 않았다.
내용도 마찬가지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 주민에게 심심한 애도(condolence)를 전한다"며 분명한 조의를 밝혔다. 반면 19일 성명에서는 "염려와 기도(thoughts and prayers)"로 대체됐고, 대상도 김 위원장이 아닌 북한 주민으로 한정했다. 조의 표명이라기 보다 북한 주민에 대한 위로에 가깝다.
빅토리아 눌런드 국무부 대변인은 20일 "그 단어(애도)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달라진 태도는 김 주석 사망 당시의 학습효과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돼 아쉽다"는 수준의 입장만 내놓자 우리 정부에 조의를 표하도록 요구했다. 한국 정부가 거부하자 미국은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인 조의 성명을 발표했다가 한국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이번 성명은 동맹국인 한국을 배려해 불협화음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발표시기, 문안 등을 놓고 한국 정부와 조율한 흔적도 역력하다. 양국 성명은 '북한주민에 대한 위로'를 공통의 키워드로 삼았다.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미국이 19일 오후 예정됐던 성명 발표시간을 3~4시간 늦출 정도로 막판까지 표현 수위에 고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미국 내 보수여론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당시 대북 유화책을 앞세워 김 주석 사망으로 중단됐던 북미고위급 회담을 재개하고, 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역풍은 거셌다. 민주당은 '굴욕 외교' 논란에 휘말린 끝에 며칠 뒤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40여년 만에 상ㆍ하원을 모두 공화당에 내줬다. 이후 클린턴은 사사건건 대북정책에 딴죽을 거는 공화당에 눌려 북한과의 약속(경수로 건설)을 이행하지 않았고, 북한은 합의 파기를 위협하며 우라늄농축 방식의 핵개발에 착수했다.
이번 성명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전략적 절충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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