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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동짓날 이 생각 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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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동짓날 이 생각 저 생각

입력
2011.12.2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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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 춘풍 이불 밑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잘 알려진 황진이의 시조다. 대담하고 멋드러진 상상력에 감탄이 절로 난다.

동짓달 밤이 긴 것은 자연 현상이지만, 마음의 조화이기도 하다. 임 생각이 간절하면 그럴 밖에. 동짓달 이야기는 아니지만 민요 '육자배기'의 사설 중에 이를 실토하는 것이 있다. "추야장 밤도 길더라. 남도 이리 밤이 긴가. 밤이야 길까만은 님이 없는 탓이로구나. 언제나 알뜰한 님을 만나서 긴 밤 짜루워 볼꺼나."

오늘(22일)은 동지(冬至),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겨울 추위에 짝이 없어 옆구리가 시린 이들에게 오늘 밤은 더욱 길 것이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차츰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질 테니, 한숨만 쉴 게 아니라 긴 밤이 언제 가는지 잊게 해줄 알뜰한 님을 찾아볼 일이다. 청승은 늘어가고 팔자는 오그라진다고, 홀로 동지팥죽 먹는 신세 한탄에 청승 떨어봤자 팔자만 오그라든다.

동지는 사실 새 날의 시작이다. 옛사람들은 이 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해 축제를 벌이고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에서 동지를 설로 삼은 것이나, 우리 조상들이 이 날을 '작은 설'로 부르며 기쁘게 맞은 것도 생명과 빛이 돌아와 새로 열리는 시간의 기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도 거기서 나왔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동지를 설과 함께 으뜸가는 명절로 여겨 군신과 왕세자가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지방에 있는 관원들은 임금에게 글을 올려 축하했다. 동지를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기 때문에 국립천문기관인 관상감에서는 새해 달력을 만들어 올렸는데,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임금의 도장을 찍어서 관원들에게 나눠 줬다. 동문지보는 에서 나왔다. "이제 천하의 수레가 동일한 궤도를 가며 글이 같은 문장을 쓰며 행동에 윤리가 같다"라는 어구에서 딴 것이다. 천하가 통일되어 태평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겼다.

동지는 동짓달인 음력 11월 중에도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로 구별한다. 올해는 하순인 28일이 동지이니, 노동지다. 속설에 노동지가 들면 노인들이 많이 간다더니, 북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한반도 정세가 불안해지고 보니, 새해 달력에 동문지보를 찍던 선인들의 마음이 새삼 다가온다.

"동지 지나 열흘이면 해가 노루 꼬리만큼씩 길어진다"고 했다. "동지가 지나면 푸성귀도 새 마음 든다"는 속담도 있다. 겨울 추위에 움츠리고 있던 푸성귀들조차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마음을 가다듬는데, 하물며 사람임에랴.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간다. 동짓달 지나고 섣달도 지나면 새 해다. 밤이 낮에 자리를 내주면서 음의 기운이 약해지고 양의 기운이 싹 트기 시작하는 동짓날, 오늘 하루만큼은 밤을 새며 한 해를 돌아보고 새 해 맞을 채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온갖 소란과 갈등과 눈물과 분노에 시달렸던 고단한 마음을 잠시 내려 놓고, 동문지보의 새 날을 기약하고 싶은 밤이다. 눈이 오면 더욱 좋겠다. 동지에 춥고 눈이 오면 다음해 풍년이 든다고 했으니.

오미환 문화부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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