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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김정일이 베를린서 죽었다면

입력
2011.12.2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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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서독 기민당 정권의 콘라트 아네나워 총리는 동독이 거래를 원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독 정치범을 서독으로 보낼 테니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동독을 인정하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천명한 우파였지만, 돈을 주고 정치범을 석방하는 것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거래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협상은 비밀리에 시작됐고, 정부 간 공식 채널이 아닌 변호사를 통한 간접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동독 정부의 권위가 실추돼 사업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수적 기민당 정권에서 시작된 비밀협상은 다음해인 63년 기민_기사_사민당의 대연정에 계승돼 마무리됐다. 당시 총리는 기민당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외무장관은 사민당 당수로 훗날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빌리 브란트였다.

그 해 8명의 정치범이 서베를린으로 넘어왔고 34만 마르크의 현금이 동독으로 건네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89년까지 동독 정치범 3만3,755명이 풀려났고, 몸값으로 34억 마르크가 들었다. 통독 당시 환율로 1조8,400억원 정도고 지금 시세로 따지면 4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 방식이 돈을 주고 자유를 산다는 의미의 '프라이카우프(Freikauf)'다.

돈 주고 정치범 산 프라이카우프

브란트는 사민_자민당의 소연정으로 집권하자 동독과의 교류, 협력을 본격화하는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프라이카우프를 진행했던 기민당은 동독 정권을 강화해줄 뿐이라며 격하게 반발했다. 72년 불신임투표에서 두 표 차이로 기사회생한 브란트는 그해 11월의 연방의회 재선거를 앞두고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선거에 도움을 주겠다"는 동독 에리히 호네커 당서기의 정략적 제안을 거절했다. 호네커는 "72년 12월 체결하기로 돼 있던 동ㆍ서독기본조약을 선거 전에 앞당겨 사인하자"고 했던 것이다.

이후 82년 기민당_사민당 정권이 들어섰고 총리가 된 헬무트 콜은 그 동안의 자세와는 달리 "동독과 체결된 협정을 존중하고, 진행 중인 협상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고속도로 건설, 도로 통행료, 비자 및 국경통과비, 우편물 발송비, 서베를린의 쓰레기 처리비, 차관 공여 등 다양한 방식의 동독 지원은 계속됐고 그 액수는 통일 때까지 무려 908억 마르크에 달했다.

독일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이유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는데도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만약 김 위원장이 동독의 절대적 지도자로 베를린에서 죽었다면 어찌됐을까. 서독은 정세를 안정시키고 동독을 움직이기 위해 다각도의 방안을 사용했을 것이다. 프라이카우프에서부터 동방정책, 기민당의 계승에 이르기까지 서독은 동독에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 신뢰를 구축했고, 이를 토대로 서로를 깊숙이 얽어맸기에 이런 가정은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또한 브란트는 기민당은 물론 미국 정부에도 동독과의 협상을 상세히 설명, 내부의 신뢰를 구축하고 맹방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도 정성을 다했었다.

우리는 어떤가. 북한과 소통할 채널도 없고 중국과의 관계도 껄끄러워 북한을 움직일 지렛대가 없는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는 콜 총리와는 달리 강경노선을 취해 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ㆍ15 공동선언, 2005년 9ㆍ19 공동성명으로 이어진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의 흐름을 끊었다.

통 크고 長兄 같은 지도자 절실

물론 남북관계가 뒤틀리고 한반도 정세가 불안정해진 데는 핵 개발, 연평도 도발을 자행한 북한의 책임이 크지만, 그런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장형(長兄)의 인내와 지혜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서독은 브란트 총리 시절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대동독 정책의 기본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상황에 따라 우왕좌왕하지 않는 일관성, 주변 강국의 이해까지 아우르는 혜안으로 통 크고, 꾸준하게 대북정책을 밀고 가는 지도자가 절실하게 기다려지는 김정일 사망 국면이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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