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미국 외교력이 한반도에 집중되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다각적 채널 협의를 가진데 이어 일본, 중국, 러시아와도 북한 문제를 조율했다. 김정일 사망 발표 이후 백악관과 국무부에는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한 외교가 인사는 18일(현지시간) 밤 백악관이 수면 중이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깨워 김정일 사망 소식을 보고한 것을 두고 "준전시 상황에 버금가는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이날 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이례적으로 두 차례 보고를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19일부터는 북한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받고 있다.
미국의 외교력은 북핵 6자 회담 참가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19일 "북한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면서 "미국은 동맹인 한국과 일본은 물론 중국, 러시아 등 6자 회담 참가국과 협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긴박감을 더해가는 미국의 움직임은 무엇보다 이번 사태가 지난달 태평양시대를 선언한 오바마 독트린의 첫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대선을 앞둔 오바마 정부의 외교정책이 한반도 위기로 인해 도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김정일 사망이 가져올 변화를 판단하기에 너무 이르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상황 안정을 외교의 우선 순위에 올려 놓았다. 후계자 김정은을 비롯해 북한을 공개 자극하거나 권력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클린턴 장관은 이날 워싱턴에서 일본 외무장관과 회담한 뒤 "북한의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전환을 원한다"며 "북한 주민들과 관계가 개선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중 모드에서 벗어나 북한에 적극적 유화 제스처를 취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을 관리할 수 있는데다 북한이 외부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도발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클린턴 장관이 20일 김 위원장의 사망과 관련해 "북한 주민들의 안녕을 깊이 우려하며 깊은 위로와 기도를 보낸다"고 사실상의 조의를 밝힌 것도 이런 차원으로 해석된다. 클린턴 장관의 발언은 북한 정부가 아닌 주민들에게 위로를 표시한 한국 정부의 담화문과 수위가 거의 일치한다. 한미 양국이 사전 조율을 통해 조의 문제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당시 미국 정부가 밝힌 조의보다는 약하지만 '미국 외교의 얼굴'인 국무장관이 사실상의 조의를 표시했다는 점에서 북미관계 개선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 주석 사망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당국이 아니라 북한 주민에게 애도를 표시한 뒤 북핵 협상 중이던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를 제네바 북한대표부로 보내 조문토록 했다. 이 같은 조문외교 덕분에 핵 협상에 속도가 붙었고 결국 김 주석 사망 3개월만인 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냈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