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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1세 소녀의 편지 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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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1세 소녀의 편지 한 통

입력
2011.12.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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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NGO를 통해 다른 나라의 소녀 조티를 후원하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소개 받았다. 얼마 전에 그는 소녀의 열 한번째 생일을 축하하고자 카드와 함께 소액의 선물비용을 송금했는데, 조티는 감사의 뜻과 함께 전달받은 축하금으로 검은 염소 한 마리를 샀다는 기쁨을 답신했다. 예전의 우리가 그러했듯이, 땟거리조차 부족한 궁핍함 속에서 가축 한 마리의 의미는 남다르다. 조금 과장하면 한 가정의 꿈과 소망이 담겨있는 희망의 끈과도 같은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에서 변함없는 것 중에 하나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관심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성경속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마가복음 10장과 누가복음 18장에는, 전무후무한 능력과 가르침으로 한창 세간에 주목을 받고 있는 예수님 앞으로 사람들이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다. 특별해 보이는 인물과 접촉하게 하고픈 갈망 속에 오늘날의 부모와 똑같은 마음이 드러나 보인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찬물을 끼얹듯이 사람들을 꾸짖었으나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가까이 부르셨고,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이들에게 속한 것으로써 어린애 같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말씀하시며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셨다.

생활 속에서 종종 사용하는 '어린애 같은'이라는 표현은 우리말의 경우 앞뒤 상황에 따라 그 뜻이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다. 좋은 뜻으로써 단순 명료함과 순수함을 내포할 수 있으나 유치함의 극치를 나타내는 부정적인 의미를 대변하기도 한다. 영어에서는 child에 붙는 접미사를 달리해서 화자의 속내를 분명히 하는데, 긍정적인 의미에는 childly나 childlike를,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여건에서는 childish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하다는 예수님의 '어린애 같음' 속에는 어떤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일까.

급작스런 산업화의 과정으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의식주 문제를 해소한 우리나라는 그에 따르는 불가항력적인 상흔을 감내해야만 했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우리 일반 서민가정에는 '애어른'이라 불리는 부모의 든든한 버팀목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숙해야만했던 그들은 자신의 희생을 마다 않고 부모와 함께 가정ㆍ사회의 고난을 헤쳐 나아갔으며 현재의 우리가 그들의 정신과 노력의 유산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최근에는 애어른의 앞뒤가 바뀐 용어인 '어른아이'가 대중매체 등을 통해 부각되곤 한다. 용어에 대한 정의와 향후 그 증가 추세에 대한 우려, 가정과 사회 도처에서 야기될 수 있는 문제점 그리고 해법에 관한 논평도 첨부되고 있다. 프리엘 부부는 다양한 경험사례를 바탕으로 <성인아이: 역기능 가정의 비밀> 이라는 저서에서 그 심각성과 증상, 치유책까지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 개개인을 포함하는 가정에 대한 성찰은 물론이고 고작 한 세대 만에 애어른으로부터 어른아이로의 탈바꿈에서 감지되는 경각심 그리고 그 시사점에 대해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현금의 용처에 대해 한창 호기심 충만할 11세 소녀로서 오만 가지 생각이 오갔을 텐데, 조티는 결국 검은 염소 한 마리를 구입했다. 코끝이 찡하고 마음은 뭉클하고 숙연해졌으며 동시에 '애어른'이라는 단어가 어렴풋 떠오르고, 머릿속에서 그 주위의 형편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혹시나 하고 조티의 이력을 살펴보니 역시나 가정의 맏이였다.

11세 소녀의 짧은 편지 한 통이 지나온 한 세대 과거와 현재 속의 가정, 부모, 어린아이의 뜻을 곱씹게 하며 마음을 촉촉하게 다스린다.

백광진 중앙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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