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 깅리치는 미 공화당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운 보수주의자다. 주의ㆍ주장이 너무 강해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에서조차 브레이크 없는 그의 보수색을 우려할 정도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정강을 앞세워 40년 만에 민주당의 하원 다수당 지위를 빼앗았을 때 보수세력은 환호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이후 가장 강력한 지도자라는 찬사가 뒤따랐다. 복지개혁, 세금감면, 범죄척결, 균형예산, 하원의원 임기제한 등을 표방한 '미국과의 계약'은 지금도 공화당이 선거 때마다 벤치마킹하는 교과서다.
중간선거 승리로 하원의장 자리를 꿰차며 거칠 것이 없어 보이던 깅리치의 종말은 의외로 빨리 왔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스캔들을 공격하면서 정작 자신은 여비서와 혼외정사 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한 순간에 웃음거리가 됐다. 다음 중간선거에서 패해 정계 은퇴를 선언한 그는 세 번 결혼에 두 번 이혼한 비윤리적 정치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런 그가 다시 돌아왔다. 보름 뒤면 시작되는 공화당 예비선거를 앞두고 깅리치는 현재 가장 유력한 공화당 대선 후보 중 하나다. 몇 달 전 선거캠프가 와해되다시피 한 위기를 겪은 그는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일거에 앞지르고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도덕성에서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고, 지나친 보수색으로 우려를 자아내는 그가 일약 대권주자로 발돋움한 것은 그만큼 공화당의 대선 기반이 취약하다는 얘기다.
사실 공화당의 대선 판도는 보는 사람도 헷갈릴 정도로 어지럽다. 롬니가 앞서가는가 싶더니 피자 체인점 사장 출신의 허먼 케인이 깜짝 스타로 등장했다 사라졌고, 다시 깅리치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제는 여론조사 1위를 해도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는 하루살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지지도가 죽 끓듯 하는 것은 유권자들이 공화당 후보들을 못미더워 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내에서는 경선과는 별도로 지금 주자로는 안되니 제3의 후보를 물색해야 한다는 소리도 강하다.
지금 공화당은 80년대 이후 가장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이념적 동질성에서는 공화당 창당 이래 지금보다 더 일사불란한 때가 없다고 한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좁고 편향적이라는 말이다. 이런 환경은 경제문제로 꽉 막혀 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재선을 도모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호재다. 이달 들어 오바마가 재선돼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처음으로 과반이 넘는 52%를 기록했다. 53%가 재선에 찬성했던 5월 조사와는 정반대다. 미 대선 역사상 실업률이 7.2%를 넘었을 때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경우는 대공황 당시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없었다. 현재 미 실업률은 8.8%로 거의 3년만에 최고치다. 이런 상황이라면 공화당 후보가 웬만큼만 해도 정권 탈환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법하다.
오바마는 정말 운이 좋다. 지난 대선 때는 때맞춰 불어닥친 금융위기로 코에 손 한번 대지 않고 대권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경기침체는 여전한데 공화당이 후보를 놓고 자중지란을 보이면서 오바마를 도와주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재선 성공이 슬램 덩크는 아니다"라는 오바마의 발언을 전하면서 "질척거리는 공화당이 민주당의 사기를 올려주고 있다"고 한 것은 비슷한 맥락이다. 낡은 정치의 상징인 깅리치가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다면 이는 오바마에게 4년 전 금융위기 못지 않은 큰 행운이다.
황유석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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