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테헤란로 좌우로 늘어선 고층빌딩 유리창 곳곳에 임차인을 구하는 현수막이 어지럽다. 일부 건물 외벽에는 '임대료 인하, 즉시 입주'라는 건물주의 다급한 심정이 담긴 문구까지 등장했다. 테헤란로는 강남역 사거리에서 지하철2호선 삼성역까지 이어지는 강남권 최고의 요지. 금융ㆍ무역ㆍ정보기술(IT) 등의 굵직굵직한 업체들이 몰려 있어 비싼 임대료에도 불구하고 늘 빈 사무실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경기 한파는 '대한민국 오피스 1번지'라는 테헤란로 일대 임대시장도 비켜가지 않았다. 삼성역 현대백화점 옆에 있는 한 건물의 경우 10층이 넘는 첨단 빌딩인데다 대로변에 자리잡았는데도 2개 층이 4개월 이상 비어 있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병원과 투자회사 등이 계약기간을 못 채우고 나간 이후 임차인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이 빌딩 관계자는 "이렇게 오랫동안 사무실이 비어있기는 처음"이라며 "임대 희망자가 가끔 찾지만 대부분 임대료를 낮춰달라고 요구해 계약이 성사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경기 둔화로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이 늘면서 테헤란로 주변 상가도 썰렁하긴 마찬가지다. 상가의 얼굴인 1층 매장조차 '임대'라는 안내문이 붙여진 채 휑하니 비어있는 곳이 부지기수고, 몇 달째 전체 층에 임차인을 구하지 못한 상가도 눈에 뛴다.
부동산투자자문회사 알투코리아에 따르면 2008년 2%대를 유지하던 강남 오피스 빌딩의 공실률은 올해 3분기 현재 6%대로 높아졌고, 평균 임대료도 3분기 연속 하락했다. 알투코리아 관계자는 "'지식서비스 산업의 메카'라는 상징성과 비싼 임대료 때문에 웬만한 기업은 테헤란로에 둥지를 틀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며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의 투자 위축과 고용 부진으로 오피스 수요가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서울 최고급 상권조차 빈 사무실이 늘고 있는 것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사무실 권리금을 포기하고서라도 사업을 접고 있다는 방증이다. 강남에서 20년 동안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해 온 손모씨는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임대료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퇴실하는 경우가 잇따르면서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싼 10층 이하 소규모 빌딩의 공실률이 특히 높은 편"이라며 "고가의 임대료를 내더라도 서로 들어오겠다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건물주들이 임차인이 나갈까 봐 오히려 눈치를 본다"고 말했다.
중소 자영업자들이 몰려 있는 종로 일대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경기 침체로 상권이 붕괴 직전이지만, 비싼 임대료는 과거 그대로인 탓에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 지역 A중개업소 관계자는 "1층 상가의 경우 보통 1억원이 넘는 보증금에 수백 만원의 월세를 요구하는데, 이런 불경기에 임대료를 내며 버티기가 쉽지 않다"며 "그런데도 상가 주인들은 과거 호황 수준의 임대료를 원하고 있어 빈 점포만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사무실을 아예 임대료가 저렴한 서울 구로나 경기 판교ㆍ안양 등 외곽지역으로 옮기는 업체도 늘고 있다. 최근 판교로 이전한 한 IT업체 대표는 "비싼 임대료를 내면서 테헤란로에 있을 필요를 못 느껴 IT기업이 밀집된 판교로 사무실을 옮겼다"며 "강남과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입지조건이 좋아 큰 불편함은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알투코리아 관계자는 "내년에도 IT업체를 중심으로 강남권에서 판교 등 외곽지역으로 빠져나가는 업체들이 많아 공실률이 줄지 않고 임대료도 약보합 수준에 머물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권준상(동국대 북한학과 4)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