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인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을 최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27세에 TV 브라운관의 작은 부품을 만드는 '교세라'라는 기업을 창업해 세계 굴지의 회사로 만든 성공한 기업가이다. 65세가 되던 1997년에 현업에서 은퇴한 후 불가에 귀의해 무(無)로 돌아갔다가 작년엔 새 내각의 간곡한 부탁으로 일본의 자존심이 걸린 파산 직전의 일본항공(JAL)의 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급으로 회장을 맡은 지 14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졸업시켜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국민의 불만 분노 키우는 재벌 상속
그와의 면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상속과 후계자에 관한 생각이었다. 그는 창업 때부터 자식이나 일가 친족에게 회사를 넘겨줄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자식들에게도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회사를 승계 받으라고 하면 부담스러워서 거절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후계자는 생각이 바르고 능력 있는 사람이면 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이래서 그의 솔선수범 경영이 회사 조직과 일본 국민을 움직여 그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도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가 될 수 있었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이 선진국보다 훨씬 불평등하고 계층 상승 통로가 막혀있다고 느끼고 있다고 한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부유층들 상속 과정, 특히 재벌들 상속과정에 나타나는 부조리가 국민들의 불평등 의식과 불만을 자극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이 단일 기업을 소유한 경우 소유지분과 지배지분이 일치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나 재벌의 경우는 다르다. 현재 우리나라는 재벌 총수와 가족이 5%미만의 소유 지분을 가지고 거대 기업을 지배하면서 소유지분이 정당화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기업과 사회의 질서가 전문가를 움직이는 능력자나 인격자보다는 재벌 후세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재벌 기업의 경영 지배권 상속 문제는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시장 친화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다. 현재의 주요 재벌 총수가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방법으로 상속세를 국가에 납부하면 된다. 자녀에게 법대로 지분을 상속했을 경우 현재의 총수보다 자녀들의 지분이 점점 줄어듦으로써 결국에는 특정 자녀가 재벌의 총수로서 전체 계열사에 대한 경영 지배권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불법 내지 편법 승계나 세무 행정상의 누수현상이 나타난다면 재벌 계열기업들이 점진적으로 계열에서 분리되고 독립된 기업으로 발전되어가는 속도가 지연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사기는 꺾일 것이고, 정-경 유착의 의혹마저 제기된다면 분노는 걷잡을 수없이 확대될 것이다.
전문 경영인 체제 유도가 해법
재벌은 한국의 대표적 기업으로서 산업화를 주도해 왔고 현재도 경제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재벌들이 전 세계에 쌓아 올린 브랜드 가치와 글로벌 경영의 경험 축적, 그리고 기술 개발과 마케팅 능력은 우리 모두의 자랑이며 우리 경제의 엄청난 자산이다.
그러나 재벌의 업적과 그 업적을 승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재벌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되 장기적으로는 전문 경영인 체제로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다면 한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역동성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즉,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사다리의 끝까지 오를 수 있다는 인식이 살아나 우리 경제가 다시 활력을 찾게 될 것이다.
최흥식 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