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은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보았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엄청난 아픔을 겪는다. 특히 탯줄을 자를 때 자기 몸이 조각났다고 상상하다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기 몸이 성하다는 환희를 맛보면서 나르시시즘이 싹튼다. 그러나 생후 6~18개월 아기는 그 몸을 자기가 아니라 남의 몸으로 여긴다. 남을 매개로 자기 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 몸을 조각나게 한 타자에 대한 공격성과 나르시시즘이 뒤엉킨 상태로 평생을 산다고 한다.
■ '프로이트의 계승자'로 불린 라캉에게 어린 아기의 주체는 인격적 자아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욕망의 주체다. 그 주체는 사회적 언어활동의 세계에서 불교의 업(業)과 같은 존재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저마다 남이 부러워하는 존재이기를 욕망하고, 그에 따라 남들이 갖는 욕망의 담론에 길들여진다. 그래서 남의 말이 나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타인의 담론을 통해 자기의 나르시시즘과 타인에 대한 적대감을 갖는다. 이미 나의 무의식에 입력된 남의 욕망이 나르시시즘을 형성했기에 남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활동에서 이성적 담론의 새 지평을 열지 못한다.
■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화려한 생일잔치를 기다리는 철부지 처녀"라고 비꼬아 말썽이 났다. 절박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의 수호천사로 다시 나선 이에게는 비록 생뚱맞지만 더없이 모욕적이다. 불과 1년 여 전 국무총리를 지낸 정부와 연(緣)을 끊지 않은 사람이 TV 시사토크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떠든 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는 "한나라당이 큰 착각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때 대권 후보를 꿈꾼 집권당의 위기를 안타까워하는 충정으로 눙쳐 들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철부지 처녀" 표현에는 라캉이 말한 무의식적 욕망, 그 빗나간 나르시시즘과 적대감이 적나라하다.
■ 철부지는 철없어 보이는 어리석은 사람,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이를 뜻한다. '철'은 24절기의 절(節)에서 유래했고, 철부지는 계절 변화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풀이도 있다. 그러나 원래 한자의 '밝을 철(哲)'은 그 자체로 지혜와 사리(事理), 나아가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을 뜻한다. 여기에 비춰보면, 정운찬 자신의 언행이 철부지에 훨씬 가까운 듯하다. 어쩌다 그리 됐는지 정확히 헤아리는 것은 정치나 언론보다 정신분석학의 몫이 아닐까 싶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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