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배반/존 캐서디 지음·이경남 옮김/민음사 발행·468쪽·2만5,000원
"요즘 경제학 과목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으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로렌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 차관이 1990년대 말 한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묻고서는 말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숨어 있는 손보다 더 강력하다는 사실입니다. 지시와 통제와 계획이 없어도 각 주체가 조직적인 구조 안에서 노력한다면 경제는 아주 잘 돌아갈 겁니다."
그로부터 10년쯤 뒤인 2008년 10월. 똑같이 자유주의 경제를 신봉해온 거물 경제인이 미 의회 청문회 증인석에 앉았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다. 금융위기의 원인을 묻는 의원의 추궁에 대한 그의 답은 서머스와는 달랐다. "조직의 이기심, 특히 은행 등의 이기심이 그들의 자기자본과 주주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점은 내 오판이었습니다.… 문제는 매우 견고한 건축물처럼 보였던 어떤 것, 실제로 시장 경쟁과 자유 시장의 중요한 기둥이 하나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미 주간지 뉴요커의 경제담당 기자가 쓴 <시장의 배반> 은 현재진행형인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이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금융위기 이후 이런 지적을 담은, 특히 언론인이 쓴 책은 수도 없이 나왔다. 월스트리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면에 어떤 탐욕과 사기와 정책 실패가 있었는가를 추적한 것들이다. 시장의>
<시장의 배반> 은 그런 책들과 달리 시장 맹신주의의 문제점을 이론적으로 분석해가며 따지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거의 경제학자 수준으로 학설과 이론을 풀어 가며 하이에크에서 프리드먼까지 자유주의 경제학의 문제점을, 정부 참여와 시장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한 케인즈와 피구, 조지 애컬로프, 대니얼 카너먼 등의 이론을 설명해가며 비판한다. 시장의>
책에 따르면 자유시장은 정상적인 기능을 할 경우 땀 흘린 노동과 개혁과 품질 좋고 값도 알맞은 제품을 공급하는 데 따르는 보답을 해준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기거나 질 나쁜 상품을 만드는 기업이나 노동자에게는 응당한 제재를 가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버블이 낄 수 있다는 점이다. 거품이 생기기 시작하면 자유시장은 더 이상 자원을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할당하는 믿을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유시장은 벼락치기 불로소득을 꿈꾸는 사람들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전망을 내놓으면서 개인과 기업이 개별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행동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대기업들은 지구온난화를 야기하며(외부 효과), 건강보험 회사가 아픈 사람들을 보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레몬 시장) 일들이 일어난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돈이라는 인센티브에 끌려 개별 이익을 극대화하려 드는 자유시장의 메커니즘으로는 언제라도 전체 경제는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때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실은 없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금융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비판이 봇물 터지듯 하면서 정부의 경제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2008년 9월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수정주의와 재난에 대한 근시안적인 태도는 점점 더 보편적인 현상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무모한 위험을 무릅쓸 만한 인센티브는 다시 고개를 들 것이고, 은행 등 금융기관의 로비 세력도 마찬가지로 기지개를 펼 것'이다. 따라서 개혁에 대한 정치적 의지가 꺼지기 전에 월스트리트의 위상을 바로 잡으라고 주문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