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시험이 사지선다에서 오지선다로 바뀌던 무렵, <토론학교> 를 기획한 김주환(48ㆍ서울 도봉고) 교사는 토론 수업을 시작했다. 두 명씩 찬반 두 그룹으로 나눠 토론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배심원으로 참여해 판정을 내리는 형식의 수업. 학생이나 선생님이나 토론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1990년대 중반, 암기 아니면 죽기살기 식의 우격다짐만 하던 때였다. 토론학교>
"제5차 교육과정 개편으로 말하기와 듣기가 교과에 포함됐어요. 그런데 제대로 말하고 듣는 방법을 교육할 수 있는 선생님도, 가르쳐주는 교재도 없었죠. 그러다가 일본에서 디베이트(debate) 학원이 성행한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게임 식으로 승패를 가르면 훨씬 재미있게 토론 문화를 배울 수 있겠더라고요."
<토론학교> 를 쓴 지은이들은 교육 현장에서 오랜 시간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고 토론 수업을 진행해 온 선생님들이다. 과학, 역사, 문학, 철학, 사회ㆍ윤리 등 다섯 분야의 쟁점을 주제로 놓고 상반된 두 입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책을 펴낸 출판사 우리학교 홍지연(41) 대표는 "학교에서 쓸 토론 교재를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일인데, 우리 시대의 대표적 논변들을 살펴볼 수 있는 교양서가 됐다"고 말했다. 토론학교>
예컨대 사회ㆍ윤리 편('공감을 배우는 토론학교')에서 외모지상주의라는 주제를 놓고 '아름다움을 추구할 권리'와 '상업주의와 차별의식의 결합'이라는 상반된 두 논리가 펼쳐진다. 이 책은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읽는 이들이 각자의 입장을 정해 논리를 보충ㆍ확장해가며 토론이라는 소통의 방식을 익히게 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쉽지 않았어요. 1년 정도 걸릴 거라 보고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기획회의만 6개월을 했어요. 끝낼 때까지 3년 걸렸습니다. 모든 주제에 대해 두 갈래의 반대된 논리를 균등하게 담는 것이 가장 어려웠죠. 집필에 참여한 선생님들이 핵발전이나 식민지근대화론 등을 놓고 개인적 입장과 다를 수도 있는 글을 합리적으로 써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과정에서 문제에 대한 자신의 논리가 더 깊어지기도 했어요."(홍 대표)
김 교사는 "토론 수업의 목적은 가치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판단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 책엔 기존의 토론 교재에 담긴 형식논리학의 기법이나 논술 답안을 채워 넣을 때 필요한 다이제스트 지식은 없다. 대신 쟁점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그렇다'와 '아니다'로 나눠볼 수 있도록 논쟁의 전선을 구체적 명제의 형태로 제시한다. 이를테면 '삼별초는 무신집권자의 용병에 불과했다'는 식. 토론 수업의 교재라기보다 토론 놀이를 즐기는 게임북인 셈이다.
"각 사안의 찬ㆍ반 논리가 균등하게 치밀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스스로의 입장을 못 정하고 혼란스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아요. 그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요. 자기의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단단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는 걸, 학교에서 배우고 졸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김 교사)
유상호기자 shy@hk.co.kr
사진=김주영기자 wi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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