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시즌 프로야구는 출범 30년 만에 처음으로 600만(정규시즌 680만9,965명) 관중 시대를 열었다. 여기에 박찬호와 이승엽, 김태균까지 돌아왔다. 한국프로야구의 파이가 더욱 커졌다. 그렇다고 이들 때문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무쇠팔'의 존재가 잊혀질 수 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불세출의 스타'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1984년 세 살배기 프로야구가 국민스포츠화(化) 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의 공이었다.
고(故) 최동원(53) 전 한화 2군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한국야구는 불행히도 프로야구 초창기 '슈퍼스타'였던 장효조와 최동원을 올해 한꺼번에 잃었다. 최동원은 장효조 전 삼성 2군 감독이 세상을 등진 지 정확히 일주일(9월14일) 뒤 동료를 따라갔다.
그는 간암 투병설이 나돌았을 때도 항상 'OK'라고 외쳤다. 짧은 머리에 금테 안경, 트레이드 마크는 그대로였지만 몸은 눈에 띄게 야위었고 배는 불룩했다. 그래도 최동원은 "정말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최고투수'의 마지막은 너무 일찍 찾아왔다.
선동열 KIA 감독과 함께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로 꼽히는 최동원은 150㎞대의 강속구와 폭포수 같은 커브로 마운드를 호령했다. 8시즌 통산 성적은 103승74패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 짧지만 강렬했다.
특히 1987년 선동열과의 세 번째 맞대결은 한국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연장 15회까지 무려 4시간56분에 걸친 완투 대결은 끝내 2-2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이날 선동열이 232개, 최동원은 209개의 공을 던졌다. 마지막 격돌에서 승부를 내지 못하면서 둘의 대결은 1승1무1패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경기는 영화 <퍼펙트게임> 으로 다시 태어나 오는 22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퍼펙트게임>
최동원은 이후 1988년 프로야구선수협회 결성을 주도하다 구단의 눈 밖에 나 삼성으로 트레이드 됐다. 삼성에서의 2년간은 그 동안의 혹사로 인한 후유증으로 내리막길을 걸은 끝에 1990년 32세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었다. 그가 야구공을 내려놓은 결정적인 이유는 선수협회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빚어왔기 때문. 그러나 그의 노력은 이후 선수협회 태동의 밑거름이 됐고, 프로야구 선수들의 권익 신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은퇴 후 1991년 지방의회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고 라디오 쇼 진행자, 시트콤 배우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그가 다시 돌아올 곳은 그라운드였다. 최동원은 2008년 한화 2군 감독 이후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위원으로 활동한 뒤 현장을 떠났다. 이후 그는 병마와 싸웠다. 그의 죽음으로 프로야구 1세대가 사실상 마무리 됐다.
올해 제 9구단의 깃발을 내건 김택진 NC소프트 대표는 지난 3월 구단 창단식에서 자신의 우상을 최동원이라 말했다.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두며 우승으로 이끈 모습을 보고 진정한 영웅이라 여겼다고 했다. 부산하면 최동원이었고, 최동원하면 부산이었다. 롯데가 곧 최동원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태어나도 한국시리즈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것이다.
마운드에서 선 그의 눈빛이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홈런 따위 맞아도 괜찮아. 난 가운데로 던진다. 어디 칠 수 있으면 쳐봐라."
김종석기자 lef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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