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고문(古文)주의자였어요. 옛글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죠. 남인들이 천주학 책을 읽으면서 신앙을 갖게 됐지만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거든요. 단지 삿된 기운이 퍼져 나간 것이라면서 그 근본은 글에 있다고 말하죠. 종교보다 글에 주목한 거죠."
작가 설흔(43)씨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는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희생된 두 문인 이옥(1760~1812)과 김려(1766~1822)의 우정을 그린 소설이다. 정조는 진보적 개혁군주로 평가 받지만 글에서만큼은 새로운 것을 철저히 배격했다. 남인을 비호하고 다수당인 노론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지만, 정작 문체반정의 가장 큰 피해자는 기댈 곳 없던 선비 이옥이었다. 그는 과거시험 자격을 박탈당하고 벌로 군역을 지었다. 멋지기>
"당시 선비들에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글이었잖아요. 글이 지금보다 훨씬 중요할 때에 그 기회를 빼앗긴 이옥에 대한 글을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어요. 김려는 기생 연과의 흥미로운 사연 외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의 문집을 읽다 보니 이옥의 아들이 글을 전하러 그를 찾아온 대목이 나오더군요. 의미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아들을 매개로 두 사람을 엮으면 되겠다 싶었죠."
실제로 젊은 시절 이옥과 김려의 우정은 두터웠다고 한다. 문체반정 당시 이옥과 친하다는 이유로 김려가 유배를 당하면서 둘 사이는 멀어졌다. 세월이 흘러 이옥은 바람처럼 떠돌다 생을 마쳤고 김려는 현감 자리에 올랐다. 그때 이옥의 아들 우태가 아버지의 글을 가지고 김려를 찾았다. 이 대목은 몇 줄 기록으로 남았지만 설씨는 김려와 우태의 만남을 시작으로 이옥과 우태, 김려의 삶의 궤적을 입체적으로 살려냈다.
"조선시대는 상상의 여지가 많아요. 사료가 너무 적으면 상상이 아니라 공상에 가깝지만 조선시대 사료는 적당하면서도 빈틈이 있거든요.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했고 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가 저의 주된 관심사예요."
설씨는 번역된 문인들의 문집을 읽고 연구서를 통해 역사적 맥락을 짚어가며 소설을 쓴다고 했다. 책 제목으로 쓴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이옥이 북한산을 다녀와서 쓴 '중흥유기(重興遊記)'의 한 대목. 아름다울 가(佳)로 쓰인 것을 그는 '멋지다'로 해석했다.
"이옥의 글 중 중흥유기와 '시기(市記)'를 좋아해요. 시기는 이옥이 군역을 할 때, 문구멍을 통해 시장 사람들을 관찰하고 묘사한 글인데 별 내용은 없어도 재미있어요. 지금 봐도 현대적인 문장이지요."
그는 내년 봄 각각 박지원의 <열하일기> 와 <금오신화> 를 쓴 김시습에 관한 소설을 낸다. 열하일기는 일반독자를, 김시습은 청소년 독자를 위한 책이다. "독자층이 다르다고 해서 기본적인 글쓰기 방식이 달라지진 않아요.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청소년기에 인간 본질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오히려 수준을 높이는 경우가 많죠." 금오신화> 열하일기>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설씨는 10여년 전부터 줄곧 조선 문인들에 관한 소설을 써왔다. 소설을 통해 당대 문인들의 글을 널리 읽히게 하기 위해서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글을 많은 분들이 읽어 보셨으면 해요." 소설 속 우태와 같은 역할이랄까. 우태가 아버지 이옥의 글을 김려에게 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이옥의 미문을 볼 수 없었을 테니.
이인선 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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