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업화와 정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영원한 철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별세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 생전에 고인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각계 인사들의 애도와 추모의 헌사가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
우리나라 산업화에 공이 큰 분이 우리 곁을 떠나게 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일본총리
처음 만났을 때 작업복을 입고 있어 공장 과장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포항제철)사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1980년대 한일 양국이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로 진통을 겪을 때 박 전 총리가 한일 정치가들 사이에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줬다. 박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안타깝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총리
박태준 선생은 일본의 신일본제철과 제휴해 한국의 철강업을 일류 기간산업으로 키웠고, 경제계의 리더로서 한국의 산업 발전, 무역 촉진에 힘을 쏟았다. 한국을 오늘날 세계 일류의 경제국가, 유력국가로 키운 공로자다. 나는 생전에 (고인과) 깊이 교류했고, 함께 힘을 모아 일한(한일) 양국의 발전, 공존공영에 힘써왔다. 아까운 친구를 잃게 돼 그 공적을 찬양하며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조정래 소설가
한국의 경제발전을 가장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성공시킨 분이다. 위대한 업적이 국민 전체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 대국이 되는데 가장 선봉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모범적인 기업인이었다. 사원들 집을 모두 지어주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모두 장학금을 대주었다. 이런 기업인은 거의 없다. 유
일한 분이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진 이후 모스크바대 총장이 방한했을 때 포스코를 보고 "레닌 동지가 이루고자 했던 이상향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공장이 완벽하게 전원에 지어져 있고 오염을 배출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사원 주택이라든지 교육 편의 시설이 완벽했다. 25년 동안 현재의 포스코를 만들어 놓고 김영삼 정부가 집권을 했을 때 해외로 쫓겨갔는데, 퇴직금도 한 푼 안 받고 공모주 한 주도 받지 않았다. 자택을 팔아 그 일부를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던 청빈한 사람이다. 성품을 보면 사무적이나 업무적으로 엄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림도 잘 그리고 음악, 문학,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다.
▦진 념 전 부총리(박태준 국무총리 시절 경제부총리)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의 주역이다.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을 일으켰고, 포스코라는 기업을 세우면서 오늘날 세계적인 철강회사로 발돋움시켰다. 관련 산업에도 큰 역할을 하셨고, 총리 때도 그랬지만 늘 나라 생각, 국민 생각, 그런 일념으로 공직에 헌신하셨다. 영원히 우리 곁에 함께 할 것이다. 명복을 빈다.
▦조영장 전 의원(박태준 자민련 총재 시절 비서실장)
한마디로 담백하고, 정직한 분이었다. 항상 기준을 정도(正道)로만 잡고, 그렇지 않은 것을 싫어하셨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치권과는 잘 맞지 않는 분이기도 했다. 자기관리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남들은 부자라고 생각하겠지만 흔한 주식 하나 없었다. 서울 아현동 자택도 팔아서 지금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든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할 정도였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동국제강과 박태준 명예회장과의 인연은 고 장상태 회장 때부터 이어져왔다. 박 회장과는 평소 큰일을 앞두고 늘 상의 드릴 정도로 각별했다. 철강에 몸을 불사르신 고인의 열정과 가르침을 한치의 소홀함 없이 따르도록 하겠다.
■ 박태준 말말말 ■
"발전 송풍 설비 폭파해!" (1977년 8월 2일 발전 송풍 현장을 돌아보다 부실공사를 발견한 뒤)
"호안이 무너지면 물속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물 밖에서 무너지겠냐?"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당시 낮은 계약금과 공기단축 등으로 공사가 염려되자)
"정치 생각하기도 싫다." (1994년 10월 11일 1년 7개월 만에 해외 유랑생활 도중 귀국해 모친 장례식장에서)
"이번 사면 복권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뜻밖의 소식을 듣고 보니 얼떨떨하지만 기쁘다." (1995년 8월 11일 정부의 8∙15대사면조치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5∙6공 인사 가운데 사면∙복권대상자로 발표되자)
"안그래도 나라안이 온통 시끄러운데 나까지 언급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1995년 10월 25일 부산에서 김윤환 당시 민자당 대표와 회동한 뒤 취재진이 비자금 파문에 대해 묻자)
"부덕의 소치로 93년 봄 이후 죄인 아닌 죄인의 몸이 되어 4년 가까이 해외로 전전해야 했다." (1996년 11월7일 포철 신화의 공로로 운경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며)
"카메라와 펜대(카메라 기자와 신문기자를 지칭)들이 많아서 거북한데…집으로 돌아와 잔치를 하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 (1996년 11월 9일 북아현동 자택에서 가진 칠순 잔치에서)
"한보철강 사업성 없어 나라면 인수 않겠다." (1997년 2월 3일 포항시가 수여하는 명예시민증을 받기 위해 경주의 한 호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한보철강 당진제철소가 시설∙공법면에서 전혀 사업성이 없다고 지적하며)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데요." (1997년 11월 21일 자민련 총재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과 5년 1개월 만에 다시 만나 청와대 경제영수회담을 끝낸 뒤)
"DJT(김대중 김종필 박태준)연대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신화창조다. 김 후보를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시키겠다." (1997년 11월 21일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자민련 총재로 선출된 뒤 수락연설 중에서)
포스코 창업 1세대들 중에 지금 상당히 어렵게 사는 분들이 많아 안타깝다. 포스코 임직원들은 항상 애국심을 갖고 일해 세계 최강의 포스코를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아내(장옥자 여사)는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 (2011년12월 포스코 임직원과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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