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대학생 시라지(23)는 성(姓)을 고치는 절차를 진행 중이다. 할아버지가 "이름만 봐도 천민인 것을 알 수 있다"며 '초두리'란 성을 버리고 '가지'를 쓰기 시작한 지 수십년 만이다. 카스트제도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인도에서, 천민 냄새 물씬 나는 성을 다시 쓴다면 손가락질을 받을 게 뻔한 노릇. 그럼에도 시라지가 성을 바꾸려는 것은 시라지 가지보다 시라지 초두리로 살아가는 게 직업을 구하는데 더 유리할 것이란 생각에서다. 말하자면 명예 대신 실리를 택한 것이다.
시라지가 성을 바꾸면 하급카스트를 공무원 채용과 대학 입학에서 우대해 주는 차별철폐정책의 수혜를 받을 수 있다. 카스트 계급이 경제적 계급과 거의 일치하는 인도의 후진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인도 정부가 1990년대부터 추진해 온 정책이다. 13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하급 카스트에게 계층 상승의 길은 하급카스트로 돌아가는 것'이란 기사에서 극심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정부로부터 '천민 인증'을 받으려는 인도 빈민의 사연을 소개했다.
카스트 제도의 6,400여 하위 계급 중 현재 차별철폐정책의 수혜를 받는 하급카스트는 2,251개다. 그러나 인도 정부가 건국 후 처음으로 카스트 실태 전수 조사를 진행 중인 지금, 자신들을 하급카스트로 분류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서벵골주에서 직조업에 종사하는 드방가(힌두어로 '신을 위한 옷을 만드는 사람'이란 뜻) 계급도 하급카스트 판정을 받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여성 문맹률이 80%에 이르고 사리(인도 전통의상) 한 벌을 만들어 몇백원에 파는 드방가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차별철폐정책을 통해 번듯한 일자리를 갖는 것이다. 드방가 계급에 속하는 콘다카 라오(42)씨는 "우리 아이들이 계층 이동을 하려면 하급카스트 자격을 얻는 수밖에 없다"며 "모두가 브라만(카스트의 가장 높은 계급)이 될 순 없기에, 그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차별철폐정책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없애야 할 구악인 카스트의 존재를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에, 계급차별을 영속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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