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 직을 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모한 승부수는 뜻밖의 긍정적 변혁을 일으켰다. 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얼떨결에 수많은 정치인들이 그토록 되고 싶어하는(?) 살신성인의 밀알이 된 셈이다.
당장 서울시장 보선은 국내 정치판에 격변을 낳고 있다. 안철수, 박원순씨가 등장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 한나라당은 보선 때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당 해체까지 갈 수 있는 미증유의 개혁에 직면하게 됐다. 민주당 역시 새로 부상한 ‘시민세력’을 포괄하는 대통합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됐다. 요컨대 무심한 날갯짓 한 번이 온 나라를 뒤흔드는 태풍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오 전 시장을 새삼 떠올리는 건 비단 정치적 요동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사퇴로 전면 무상급식이 시행됨으로써 복지캠페인의 허실을 차분히 짚어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의도하지 않은 ‘공로’이기 때문이다. 무상급식 시행에 따른 서울의 교육예산 조정은 한마디로 ‘공짜점심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준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가계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인 학생들에게 주던 무상급식을 모든 학생에게 주는 것으로 넓히느냐 마느냐를 물은 것이었다. 오 전 시장 측은 예산을 감안해 ‘선별 무상급식’을 유지하면서 점차 무상급식 대상을 넓혀가는 게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눈칫밥을 먹이자는 얘기냐”는 야권의 감성적 호소에 묻혀 맥을 추지 못했다. 나중엔 “어린이 급식비 2,500원은 못 쓰겠다며 시장은 한 끼에 10만원이 넘는 기름진 밥을 먹었다”는 식의 한심한 기사까지 등장했으니, 기술적으로 눈칫밥 안 먹게 할 수 있다는 오 전 시장 측의 주장은 애초에 먹혀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짜점심’의 대가는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식으로 조용하지만 빠짐없이 시민들에게 부과되고 있다. 서울시와 시교육청 예산이 대거 무상급식에 투입되면서 당장 학교병설 유치원 등을 지원하는 유아교육 지원예산은 90억원이나 줄었다. 성폭력 등의 방지를 위한 학교보안관실 예산도 20억원이 줄고, 다양하게 자리잡고 있는 방과후 학교 내실화 지원 예산도 13억원 가까이 줄었다. 각급 학교 원어민 교사 예산이 대폭 감축되면서 당장 내년부턴 일반고교 영어 원어민 교사가 전부 해고될 상황이 됐다.
형편이 좋지 않은 학부모들이 부담해야 할 교육비 지출 역시 늘어날 공산이 커졌다. ‘선별 무상급식’이 유지됐다면 교과 준비물은 무상 지급키로 했었다. 저소득 학부모들은 자녀 급식비뿐만 아니라, 준비물 비용도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교과 준비물 비용을 부담해야 할 뿐 아니라, 방과후 학교나 돌봄교실 등의 예산 축소로 맞벌이 가계의 부담도 커지게 됐다. 결국 정치인들은 생색 내며 선심을 썼지만, 무상급식의 대가는 고스란히 납세자가 부담하게 된 것이다.
전면 무상급식의 승리로 이젠 여야 정치권이 모두 내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무제한적 복지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 됐다. 어차피 세금 내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고, ‘선심’ 쓴 만큼 ‘표’를 얻는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하지만 ‘선심’의 목록이 늘면 늘수록 납세자의 부담과 대가도 늘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이 가시화하고 있다. 최근 여야 정치권과 정부가 은근히 불을 지피고 있는 과세기반 확대니, 전체 근로자와 자영업자의 41%가 세금 한 푼 안 냈다는 등의 주장은 쉽게 말해 앞으로 세금 더 많이 거둬들이겠다는 포석인 것이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는 빈자(貧者)만을 위한 지배체제로서 공공선을 지향할 수 없다”고 했다. 이상론에 동의하긴 어렵지만 지금 우리는 정작 빈자를 위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을 빙자하는 가증스런 선심정치의 쓰나미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정치의 계절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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