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7월 5일 영국군 4,000여 명을 태운 군함 28척이 중국 광저우 해상에 출현했다. 보름 전 인도, 스리랑카를 출발한 함대였다. “한 줌의 서양 오랑캐들”이라며 허세를 부렸던 청군은 단 한 차례도 이기지 못한 채 연전연패를 거듭하다 2년 만인 1842년 8월 29일 치욕적인 난징조약에 서명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홍콩을 내주고 상하이 등 주요 도시 5곳을 개방하는 한편 어마어마한 액수의 배상금까지 물도록 한 내용이었다. 아편 판매를 금지하고 밀거래 무역상을 처벌한 지극히 정상적 행정조치를 문제 삼아 영국이 도발한 ‘아편전쟁’이다.
▦이후 중국대륙은 열강이 멋대로 농단하는 놀이터가 됐다. 백성들은 일상에서도 외세에 대해 아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로 전락했다. 영국 등이 풀어댄 아편은 무제한으로 퍼져나가 19세기 말엔 중독자가 인구의 10%에 달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소련에 당하고 베트남에게도 밟혔다. 이른바 ‘굴욕의 160년’이다. 상처가 너무 아프고 깊었던 때문일까. 개혁개방으로 굴기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은 종종 국제사회의 룰과 상식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 어릴 적 폭행피해자가 성장해 가해자가 되는 양태와 빼닮았다.
▦불법조업 중국어민의 해경 살해사건에 대한 중국 내 설문조사에서 무려 81%가 “한국 책임”이라고 답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실제로 “이것이 중국 남아” “우리의 영웅” “감히 한국이 중국에 책임을 묻다니” 식의 중국 네티즌 반응에는 그저 기막힐 따름이다. 철딱서니 없는 일반인이야 그렇다 쳐도 “한국여론 침착하라. 한국언론 보도 자제하라”는 일부 관영매체의 적반하장에는 차마 화를 누르기 어렵다. 범인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대우부터 요구해 역시 분노를 샀던 중국 정부가 뒤늦게나마 정중하게 유감의 뜻을 표명한 것은 다행이다.
▦지난해 중국의 한 경제사학자는 중국문화의 가장 큰 문제로 ‘유표법리(儒表法里)’를 들었다. 겉으론 유가의 인의도덕(仁義道德)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법가의 힘(權力) 중심 가치를 따른다는 것이다. 중국 내부에 대한 비판이지만 고려대 신봉수 교수는 이를 대외적으로 확장한 ‘왕표패리(王表覇里)’가 중국의 세계전략 논리라고 지적했다. 겉으론 평화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힘에 의한 패권 추구가 중국의 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일관되고도 당당한 원칙적 대응이 그나마 이웃간 법도를 일깨우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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